본문 바로가기

20 SUMMER

반짝하고 사라지는 것 (상) [w. 지배인 - 김채원 x 권은비]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달라져갔다. 영원히 맥을 이어나갈 것 같던 이씨 왕조가 사라졌고 그 위에로 대놓고 부조화스러운 총독부 건물이 들어섰다. 그렇다고 그 건물이 이상해 보이냐고 물으면 딱히 그렇지도 않았다. 어른들은 종종 조선인의 뿌리를 잊지 말라고 숱하게 얘기해왔다. 하지만 채원에게 있어선 그게 무슨 말인지 사실 알지 못했다. 채원뿐만 아니라 채원의 또래들 대부분이 그랬다. 조선이란 나라에 살아본 적도 없고 태어나보니 일장기가 휘날리고 있었다. 그러니 머리로도 마음으로도 와닿지 않았다. 더욱이 채원은 심성 자체가 평범했다. 무난했고 조용했다. 어떤 걸 해도 좀체 감정 변화가 크지 않았다. 때문에 사람들이 감정을 확인하려 들면 그마저도 적당한 말로 둘러대곤 했다. 오늘도 채원은 괜찮다고 말을 꺼냈다. 깔끔한 정장을 입은 사내는 연거푸 안 된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정말 괜찮아요. 먼 거리도 아니고.”

그렇지만

지각하겠어요. 가볼게요.”

 

 

 

 

채원이 짐짓 단호하게 말하자 사내는 포기한듯 물러섰다. 이내 차 열쇠를 주먹에 움켜쥔 채로 조심히 다녀오란 말과 함께 인사를 했다. 가볍게 맞인사를 한 채원은 몸을 돌려 등굣길을 걸었다. 항상 차창 밖으로만 등굣길 풍경을 봐 왔는데 오랜만에 걸으니 기분이 좋았다. 아침공기가 상쾌했다. 등굣길에는 이따금씩 칼을 찬 순사들이 돌아다녔다. 사람들의 발걸음도 빨라졌다. 아버지가 가끔씩 말씀해주시던 그들의 비도덕함이 떠올랐으나 채원은 발걸음을 빨리 놀리지 않았다. 그렇게 걷고 있는데 순간 이마에 차가운 느낌이 들었다. 놀라 확인해보니 물이었다. 손바닥 위로 여러 빗방울들이 떨어졌다. 순식간에 채원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비가 오는 것도 오는 것이었지만 학교까지 아직 한참이었다. 이러다 학교에 도착하기도 전에 비에 쫄딱 맞게 생겼다. 뒤를 돌아 집 쪽을 쳐다봤지만 집도 멀어진지 오래였다. 급하게 가방을 머리 위로 들었다. 채원은 점점 굵어져가는 빗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굵은 비가 사정없이 내렸다. 땅도 온통 흙탕물이 되어갔다. 온 곳에서 느껴지는 차가움에 채원은 인상을 찡그렸다. 뛸 때마다 튀기는 흙탕물도 싫었다. 아까 기사님이 타라고 할 때 탈 걸. 젖어서 무거워진 몸으로 뛰면서 채원은 후회를 했다.

 

드물게 지나가는 차들이 고인 물을 밟아 물보라가 생기는 바람에 채원은 길가로 바짝 붙어 있었다. 빗속으로 또 자동차 소리가 들렸다. 채원은 다시금 길가로 몸을 붙였다. 그렇게 차가 알아서 지나가겠거니 싶었는데 웬걸 차는 지나가지 않았다. 가까워진 차 소리에 채원은 차 쪽으로 고개를 틀었다. 자신의 옆으로 선 차 때문에 채원도 가던 길을 멈췄다. 차창이 돌돌 내려갔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학교 가니?”

…….”

어디 다녀?”

 

 

 

여자는 채원이 입은 교복을 보며 물었다. 낯선 사람에 채원은 경계하느라 빨리 말이 나오지 못했다.

 

 

 

동덕여고보요.”

나랑 같네. 탈래?”

 

 

 

 

채원은 비를 맞고 있으면서도 좋다싫다를 바로 답하지 않았다. 그런 채원이 답답해 보였던 것인지 여자가 대뜸 차문을 열었다. 그리고 자신은 반대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 학교 늦겠다.”

 

 

 

 

의외로 채원은 순순히 차에 몸을 실었다. 옷이 젖은 건 이미 어쩔 수 없지만 지각까지는 할 수 없었다.

 

 

 

 

몇 학년이야?”

 

 

 

 

덜컹거리는 차 안에서 여자가 말을 꺼냈다. 채원은 눈도 못 마주친 채로 답지 않게 웅얼거렸다.

 

 

 

 

“2학년이요.”

나는 5학년. 학교는 다닐만 해?”

.”

궁금한 거나 어려운 일 있으면 물어봐. 아 그러지는 못하나.”

 

 

 

 

학기가 시작한지 벌써 세 달이 지난 시점에서 여자의 질문은 그다지 자연스럽지 못했다. 게다가 나는 신입생도 아닌데. 그러다 돌연 여자는 자문자답을 하며 왜인지 모를 자소를 지었다. 채원은 그런 여자가 조금은 신기해서 힐끔힐끔 쳐다봤다. 그러다가 눈이 맞았는데 화들짝 놀란 채원이 눈을 먼저 피했다. 여자는 그런 채원의 모습에 작게 웃었다. 차는 비를 뚫으며 잘만 나아갔다. 차로도 꽤 가는 거리에 오늘은 바보 같은 짓을 했다고 채원은 자책했다. 여자의 웃음 이후로 정적이 이어진 차 안은 학교 교문에 다다라서야 해소 되었다.

 

 

 

 

아저씨. 운동장 안으로 들어갈 수 있죠? 이 친구가 너무 젖어서 교문부터 못 들어가겠는데.”

, .”

최대한 학교 안까지 들어가주세요.”

 

 

 

차는 교문을 지나쳐 운동장을 가로질러 들어갔다. 교문 앞에는 학생주임과 풍기계원(선도부) 학생들이 서 있었다. 학교 내부에서라면 나는 새도 떨어뜨릴 존재들이었다. 그런데 차가 교문을 그냥 지나쳐도 아무런 제지를 하지 않았다. 더구나 교문부터 시작해 운동장 곳곳에서 보이는 상징물 따위에도 인사하지 않아도 됐다. 채원은 새로운 경험에 눈이 동그래졌다. 여자는 차가 멈추자 우산을 들고 문을 열었다. 채원도 어서 나가려고 문의 손잡이를 잡았다. 여자가 트렁크 쪽으로 빙 둘러 때마침 나온 채원의 머리 위로 우산을 씌워줬다. 여자의 시선이 채원보다 조금은 낮아서 얼떨결에 왼쪽 가슴팍에 박힌 명찰을 확인할 수 있었다.

 

권은비.’

 

은비는 비가 들어차지 않는 처마에 다다라서야 우산을 거뒀다. 그제야 채원도 산만했던 정신이 정리 됐는지 은비에게 감사인사를 했다.

 

 

 

태워주셔서 감사해요.”

별 거 아니야. 그보다 옷 젖었는데 보건실이라도 들려. 감기 걸리면 어째.”

…….”

몇 반이니? 담임은 누구야? 내가 말이라도 남길게.”

괜찮아요.”

괜히 선생한테 옷 불량하다고 안 맞았으면 좋겠어서 하는 말이야.”

 

 

 

채원에게 있어서 은비의 관심은 과도했다. 괜한 오지랖이라고 짧게나마 생각이 들기도 했다. 원래라면 부담스러웠을 그 관심은 오늘따라 듣기 괜찮았다. 은비는 정말 걱정이 되는 건지 눈썹을 팔자로 늘어뜨렸다. 채원은 은비의 진심이 느껴져서 더이상 밀어내지 못했다.

 

 

 

“3, 소가 히로유키.”

말 해둘게. 보건실 가서 좀 쉬어.”

감사해요.”

이따가 또 볼 수 있으면 보자, 채원아.”

 

 

 

은비도 어느새 제 명찰을 본 건지 제 이름을 또박또박하게 발음하곤 교실로 올라갔다. 은비는 언제인지 기약을 알 수 없는 만남을 예정했다. 그리고 채원이 그게 이상하다고 생각할 겨를 없이 은비가 불러준 이름에 반응 했을 때 비는 그쳤다. 무섭게 내리던 비는 거짓말처럼 그쳐 있었다. 소나기였다. 지금처럼 마치 짧고도 굵은 그런 소나기.

 

 

 

 

 

 

보건실에서 젖은 머리를 정리하고 옷가짐을 가지런히 했다. 교복 옷감이 쭈굴쭈굴 주름 져 있었다. 되지도 않지만 교복 상의 밑단을 잡고 아래로 세게 잡아 당겼다. 몇 번을 팡팡 잡아당겨 꽤나 정갈하게 만들었다. 차림도 정돈 됐겠다 이제는 보건실 선생님의 눈치가 보여 채원은 보건실을 나섰다. 교실로 가는 길에 다른 선생이라도 만날까봐 채원은 발을 빨리 놀렸다. 1교시 수업 도중에 등장한 채원을 몇몇 친구들이 힐끗 거리며 봤다. 그러자 선생이 교탁을 소리 나게 치고는 집중 하라고 덧붙였다. 선생은 채원이 제자리를 찾아 들어갈 때까지도 채원을 보지도 않았다. 정리했다곤 해도 아직 고르지 못한 용모에, 수업 도중에 들어온 채원에게 관심도 없었다. 정말 그 선배가 담임에게 말을 남긴 모양이었다. 독선적인 성격이 강한 담임이 무슨 일로 얌전하게 있는지 채원은 궁금했다. 채원이 자리에 앉자 짝꿍인 수연은 교과서 위로 글자를 끄적였다.

 

왜 이리 늦었어?’

 

교실엔 선생 혼자 교과서를 낭독하는 소리만 들렸다. 채원이 가방 속 필통을 꺼내려 하자 수연은 제가 들고 있던 연필을 건넸다.

 

갑자기 비가 왔어.’

아저씨랑 안 왔어?’

오늘은 걸어서 가겠다고 했어.’

 

 

수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문득 더 할 말이 있었던 건지 다시 끄적이려던 수연은 이내 그만뒀다. 채원은 그런 수연이 싱겁다고 속으로만 생각했다. 지루한 국어시간이 끝나고 그 시간 내내 채원은 찝찝해 죽는 줄 알았다. 장마가 끝나고 본격적인 여름이 찾아오려는지 덥고 습했다. 옷은 아까보다 말랐다. 그렇지만 6교시까지 이러고 있으려니 막막했다. 쉬는 시간이 되어 그 다음 교시 교과서를 꺼내려는데 수연이 아까 못한 말을 꺼냈다. 수연의 목소리는 조용했다.

 

 

 

 

아까 권은비랑 같이 왔다며?”

…….”

너 걔가 누군지 알고 같이 와?”

누군데?”

 

 

 

 

수연은 그것도 모르냐면서 호들갑을 떨어댔다. 채원은 정말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권용호 후작 딸이잖아.”

 

 

 

 

채원은 이제야 아까 차 안에서 은비가 자조적으로 말하던 그 말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학생주임과 풍기계원들이 버티고 있던 교문을 지났던 것도, 온갖 트집을 잡아 깐깐하게 굴던 담임이 조용했던 것도 다 그런 배경이 있어서였구나.

 

이 동네뿐만 아니라 이 나라에서 권용호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기회주의자이자 이기주의자인 그는 가장 발 빠르게 이 나라를 일제에게 넘겼다. 일제의 앞잡이를 자처하며 세계지도 상에서 조선을 없앤 매국노였다.

 

 

 

걔랑 친하니?”

아니.”

앞으로 엮이지 마라. 매국노 소리 듣기 싫으면.”

 

 

 

 

암만 채원과 그 또래들이 조국이란 그 어떤 뜨거운 감정을 진정으로 느끼기 어려웠다 하더라도 형체는 알았다. 그리고 하지 말아야 할 것과 해야 할 것을 구분했다. 그래서 채원은 아까 은비에게 느낀 고마움이 희석되어 가는 것만 같았다. 그렇지만 또 진정으로 걱정하던 그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려 어려웠다. 모순이 뒤섞인 감정은 끝내 더 이상 생각하기를 거부했다.

 

6교시가 끝나고 종례를 하는데 또다시 비가 내렸다. 교복이 겨우 말랐는데 또 비 맞은 생쥐 꼴을 하고 하교할 판이었다. 이번에는 교무실에 들려 집으로 전화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선생의 종례가 끝나고 아이들이 교실을 우르르 나갔다. 수연은 오늘 집에 일찍 가봐야겠다며 먼저 일어났다. 채원은 고개만 끄덕였다. 채원이 가방을 싸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무슨 일인지 수연이 뒷문에 가만히 서 있었다. 얼른 가까이 가 수연 어깨 너머로 보인 건 은비였다. 수연과 은비 사이에 알게 모르게 오고가는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하교를 위해 복도를 지나가는 아이들은 연신 수군대기 바빴다. 들릴 듯 들리지 않을 듯 그런 목소리로 은비를 겨냥한 이야기를 해댔다.

 

 

 

 

낯짝도 두껍네.”

같이 가자.”

 

 

 

 

은비는 수연의 말을 무시하고 채원을 보며 말했다. 수연은 3학년이나 차이 나는 은비에게 그 어떤 존경의 말을 담지 않았다. 학교 선배를 대하는 태도도 없었다. 은비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굴었다. 졸지에 가운데 낀 채원이 곤란해졌다. 수연이 은비에게 시선을 거두더니 채원을 바라봤다.

 

 

 

 

친해?”

아니.”

 

 

 

 

채원은 기시감을 느끼며 똑같은 질문에 똑같은 대답으로 응했다.

 

 

 

 

그쪽이랑 안 친하다는데.”

 

 

 

 

어느새 수연이 채원의 손목을 잡은 채였다. 흔들리지 않던 은비가 잠시나마 흔들린 것 같은 건 착각일까.

 

 

 

 

비가 오길래 나는,”

분수를 알아야지. 같잖게. 왜 똑같이 구는 척 해.”

수연아.”

 

 

 

 

점점 고조 되어가던 분위기는 채원으로 인해서 사그라들었다. 시종 밝게 있던 은비의 얼굴은 굳은 채였다. 채원은 아무 사이 아니라며, 집 가는 게 안 급하냐며 수연을 달랬다. 채원의 노력에 수연은 은비를 노려보던 시선을 거뒀다.

 

 

 

 

갈게. 저 사람 따라가지 말고.”

.”

 

 

 

 

채원이 수연과 인사를 나눴다. 수연이 채원을 등지고 하교했다. 은비랑 말을 나누기 전에 복도 창문으로 밖을 확인했다. 비는 그치지 않았다. 은비는 수연이 가자마자 하고 싶었던 얘기들을 쏟아냈다.

 

 

 

 

종례 시작하니까 비가 내리길래 네가 생각나서 왔어.”

…….”

오지랖인 거 아는데 너 우산도 없잖아. 그래서 그냥,”

선배 혼자 가요.”

?”

어차피 하굣길인데 이젠 젖어도 아무런 상관 없잖아요.”

…….”

집 근처 사람들이 언니 차에서 내리는 저 보면 이상하게 생각할 거예요.”

 

 

 

 

은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반면에 채원의 표정은 동요가 하나도 일지 않았다. 아침에 차를 얻어 타기 전엔 그녀가 누구인지 알지도 못했으니 호의에 얻어 탔으나 알아버린 이상 그럴 수가 없었다. 은비는 채원의 말에 아무런 반박조차 하지 못했다. 그저 인사도 없이 뒤돌아 2학년 층을 도망치듯 떠났다.

 

 

 

 

은비는 차에 올라 집으로 돌아가면서 생각에 잠겼다. 이 세상에 태어난 후로 하루도 빼먹지 않고 제 존재를 혐오해왔다. 어느 남자들처럼 잘나도 사회에 어떤 것도 이바지 할 수 없는 제 타고난 성별을 저주했고 친아버지가 매국노인 것을 증오했다. 언제 어느 순간 목숨을 끊어도 이상하지 않을 자신이었다. 사람들이 보내는 모멸감도 이제는 익숙해져 내성이 생겼다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나보다. 지나칠 수도 있었던, 저와 같은 학교 학생이 아니었을 수도 있을 그 아이를 왜 차에 태웠을까. 시작이 잘못 되어도 한참 잘못 되었다. 은비는 처음 느끼는 감정에 혼란스러웠다. 제 위치는 생각 않고 어디서든 예쁜 소녀들을 보면 가까운 금은방으로 들어가 금반지를 사다 바치던 은비였다. 연서를 줄줄이 써서 금반지와 함께 주면 받는 이도 있었고 가끔은 거절하던 이도 있었다. 그런데 그때 거절 당하던 그 심정보다도 지금이 곱절은 더 마음이 아팠다. 이유는 몰랐다. 채원은 그 누구에게 주던 금반지와 연서보다 감정의 깊이가 남달랐다. 은비는 덜컹 거리며 가는 차와 마찬가지로 마음이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르고 헤맸다.

 

 

 

 

 

 

*

 

 

 

 

 

 

씻고 거실로 나오라는 아버지의 말씀이 어딘가 심상치 않았다. 밝고 유쾌했던 집안도 가라앉아 있었다. 어머니는 계속해서 아버지와 채원의 눈치를 보며 별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 중 가장 무덤덤한 건 채원이었다. 씻고 옷을 갈아입은 채원이 조용히 소파에 앉았다. 마주 본 아버지의 얼굴에선 깊은 수심이 느껴졌다. 하고픈 말이 대체 무엇이길래 평소의 성정 답지 않게 뜸을 들이는지. 아버지에게서 나온 말은 매우 뜻밖이었다.

 

 

 

 

혼사가 잡혔다.”

아버지.”

 

 

 

 

이번엔 채원이 답지 못하게 굴었다. 학교를 졸업하려면 삼년이나 남았다. 채원은 마음속에 자리한 어떤 것이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토록 동경하던 신여성이 당장이라도 목전에 둔 것 같았는데. 배우고 싶은 것은 넘쳐났고 그녀는 자신의 열의를 잘 따라가고 있었다. 공부도 곧잘 잘해 동무들의 부러움도 얻어봤고 선생들도 조선인이지만 내지(內地)를 가도 잘할 것 같다는 평을 내리곤 했다. 그런데 그렇게 힘들게 얻은 것들을 이 겨우 혼사 하나로. 구석부터 무너져 내리던 평정심은 얼마 안 가 붕괴했다.

 

 

 

 

아버지, 졸업하고졸업하고 혼사 한다고 약조 했잖아요. 학업만 마치게 해주세요 예? 아버지 제발요.”

이 아비가 그걸 왜 모르겠니. 그쪽에서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고 떼를 쓰는데 나로서도 뭐라 못하겠더구나.”

저 이대로 포기하기 싫어요. 아버지처럼 배워서 되고 싶단 말이에요. 제가 아버지 말씀을 안 따르기를 했어요, 아니면 공부를 못하기를 했어요. 삼년만요. 졸업만 하면 뭐든 다 할게요.”

 

 

 

 

간절하다 못해 애절하기까지 한 채원의 진심은 빠르게 쏟아졌다. 눈물도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서럽게 우는 제 딸을 보자니 절로 가슴이 미어져 그는 눈을 감아 내렸다. 하나뿐인 딸의 간청을 그는 들어주고 싶었으나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병원을 가야 하지만 돈이 없어 그저 길거리에 나도는 동포들을 대가 없이 적선하는 그였다. 그래서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병원 재정은 궁핍해져만 갔다. 가정을 운영할 여유조차 없어지려 할 때 후원자가 나타났다. 명석한 그의 딸을 며느릿감으로 노리는 자들이 많았는데 후원자도 그들 중 하나였다. 후원을 약속하며 제 아들과의 혼사를 잡았다. 채원도 졸업 후라면 혼사는 거뜬히 하겠다고 했었다. 그런데 최근 들어 그 집안 어른에게 우환이 생긴 건지 지금 아니면 안 된다고 혼사를 강권하더란다. 죽기 전에 손자가 혼인하는 걸 보겠노라고. 사정이 이렇게 되자 후원자도 지금 못하면 후원을 끊겠다고 윽박질렀다.

 

 

 

 

채원아.”

이번 한번만 마지막으로 제 편 들어주시면 안돼요?”

…….”

나는, 나는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요. 아버지

 

 

 

 

채원은 쉽사리 울음을 그치지 못하고 그 자리서 펑펑 울었다.

 

 

 

 

-

 

 

 

 

밤새 울어 퉁퉁 부은 눈으로 채원은 담임 앞에 자퇴서를 냈다. 담임은 깜짝 놀라 채원에게 무슨 일이 있냐고 물었다. 채원은 다시 눈물이 날 것만 같아서 입술을 꾹 깨물었다. 담임이 봉투 속 자퇴서를 꺼내 자퇴 이유를 확인했다. ‘婚事

 

담임인 히로유키는 채원이 이해 갈듯 말듯 했다. 성적도 준수하고 학교생활도 모난 곳 없이 잘 하는 아이였다. 비록 여자지만 사상만 더 다듬는다면 제국을 위해 공을 남길 수 있었다. 그런고로 히로유키는 다른 의미로 채원의 자퇴를 말렸다.

 

 

 

 

좀만 더 생각해보면 안 되겠니?”

…….”

네가 우등생 아니니. 그런데 이런 식으로 갑자기 자퇴를 한다니까 선생님은 이해가 안 가.”

죄송해요.”

채원!”

 

 

 

 

히로유키가 무엇을 더 말하려고 하기도 전에 채원은 걸음을 돌려 교무실을 나갔다. 채원은 학교 교문 밖에 서 있는 차를 보며 난생처음 하지도 않던 원망을 했다. 그까짓 동포가 뭐라고, 피로 맺어진 따위도 아니면서 동포라는 이름 아래 살뜰히 챙기는 꼴이 싫었다. 아버지가 그들을 무상으로 안 도와주면 될 일 아니야. 왜 본인의 욕심을 위해 날 이용하냔 말야. 원망과 울분은 재차 쌓여 울음을 만들어냈다. 어떻게 된 게 이 세상에 제대로 된 내 편이 하나도 없어. 얼마 지나지 않아 채원은 그득그득 차오르는 감정이 원망이 아님을 알았다. 원망은 배신감을 함께 가져왔다. 굳게 믿던 아버지와 가족에게 채원은 배신감을 느꼈다. 홀로 벼랑으로 내몰려진 채원에게 손을 잡아줄 이는 아무도 없었다.

 

 

 

 

 

 

*

 

 

 

 

 

 

은비는 그 날 이후로 채원을 보지 못했다. 찾아갈 용기도 없었거니와 수학여행이 다가와 정신이 없었다. 장마철이 꽤 지났음에도 소나기가 자주 내렸다. 전쟁이 심화됨에 따라 일제의 횡포도 거세졌다. 그래도 사립학교인 덕분에 일제의 관리나 감시가 덜했었다. 하지만 일제는 전쟁의 선전을 위해 손이 닿을 수 있는 구석구석까지 압박을 가했다. 이번 수학여행도 그랬다. 보통이라면 평양, 경주 등 국내의 관광지로 수학여행을 갔을 일이었다. 일제는 식민지 조선인들에게 자신들이 이룩한 산업화를 보여주어 자존심을 짓밟고자 했다. 덩달아 수학여행지도 도쿄로 정해졌다. 은비는 떠나기 전날부터 구역질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제 아버지를 끔찍이 증오했다. 조선에 있으면서도 가지고 있는 환경 탓에 보는 일본인과 일본의 것들도 싫었는데 그들의 본토로 간다니 은비는 못 견뎌 죽어버릴 것만 같았다. 무를 수도 없게, 나도 모르게 아버지가 내버린 수학여행비에 은비는 역해진 속을 참았다. 그 가운데 알게 모르게 채원이 생각난 것도 이상했다. 열흘은 될 여정에 왜 채원이 생각났을까. 은비는 수학여행 당일 날까지도 여전히 자신의 마음을 정의하지 못했다.

 

그렇게 도쿄로 향하는 상행(上行) 부산행 기차에 동무들과 함께 몸을 실었다. 자랑스럽게 보여준다는 것이 고작 이런 곳이라고. 메이지 신궁이며, 야스쿠니 신사며 돌아다니는 곳마다 치가 떨리는 장소들이었다. 수학여행을 온 건지 사상을 다지려 온 건지 알 수 없을 만큼 참배를 강요했다. 그럴 때마다 은비는 참배가 끝난 후 올라오는 토악질을 견디지 못했다. 냅다 구석으로 달려가 속을 비워냈다. 선생들은 어디가 아프냐고 물었고 동무들은 무시하기 일쑤였다.

 

꼴에 양심이라곤 있나 봐.’,

무슨 소리. 쟤가 뭐가 아쉬워서 양심을 챙기니.’,

그냥 무시해라. 저 속을 어찌 알아? 매국노 놈들은 연기도 잘하지 않던?’

 

듣지 않으려 해도 들리는 소리에 은비의 눈만 벌겋게 올랐다. 아무도 보이지 않는 곳으로 숨고만 싶었다. 애써 그들을 모른 척 하며 먹은 것도 없어 멀건 위액만 뱉어낼 때 소나기 속 채원이 떠올랐다. 힘들 때 떠오르는 사람은 특별한 의미라도 있을까. 소나기처럼 정말 짧았던 만남. 그렇지만 그만큼 강렬했던 만남. 무수히 사다 바친 금반지와 연서를 두고도 깨닫지 못했던 은비는 이제야 깨달았다. 장난거리가 아니라 첫 눈에 반했나 보구나. 타국에 와서 느낀 감정은 더욱 은비를 사무치게 만들었다. 고작 수학여행이고 조선으로 돌아갈 수 있음에도 채원이 손에 잡히지 않을까 은비는 두려워졌다. 실소를 터뜨리며 웃던 은비가 자리에서 일어섰을 때 마주한 상징물은 너무나도 이질적이었다. 일제를 상징하는 것과 은비가 묘하게 닮아 있었다. 벗어나려 해도 벗어날 수 없는 그림자에 갇힌 은비는 앞이 보이지 않았다. 그림자 속 어둠에 채원이 보고 싶었으나 보이지 않았다. 제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은비와 채원은 닮은 듯 달랐다. 은비와 채원은 각자 다른 상황 속에서 제 편 하나 없는 세상을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