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이 내린 바다
김민주 김채원
01. 적색 별
김채원과 김민주의 첫 만남은 카페 알바생과 손님이었다.
21살 김채원. 채원은 그래도 대학 생활 중에 휴학은 한 번 해보자는 마음으로 휴학서를 내고 휴학을 결정했다. 휴학서를 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자주 가던 카페 창문에 -알바생 구함- 이라고 적힌 포스터를 본 채원은 바로 알바를 지원했다. 별다른 면접 없이 내일부터 일하라는 소리에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를 외친 채원은 기분 좋은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역시는 역시. 알바를 시작한 채원은 일주일 동안 3킬로가 빠졌다. 남의 돈 버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럽게 힘들어. 씨발. 씨발. 아오. 워낙 유동인구가 많아서 사람도 많았고, 진상 아닌 진상들도 넘쳐나는 곳에서 채원은 과거의 자신을 성찰했다.
어쨌든 그렇게 일주일쯤 지났을 때, 카페 손님으로 온 민주를 처음 만났다. 갈색 긴 생머리에 동그란 눈. 오뚝한 코. 약간 사막여우를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아무렇게나 봐도 예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날부터 꾸준히 민주와 마주친 채원이었다. 같은 시간에 와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사가는 민주였다. 가끔 마카롱이나 마들렌도 사서 아이 같은 웃음을 짓고는 카페를 벗어나는 민주의 모습을 넋 놓고 바라보다 다른 손님 주문을 깜빡한 적도 있었다. 여중여고여대를 다니면서 채원은 연애 한 번 해본 적이 없었다. 물론 짝사랑은 해봤다. 고등학교 1학년 때 같은 학교 회장 언니를 말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호감의 의미가 아닌 동경의 의미였던 것 같기도 하지만. 어쨌든 그런 김채원이 외사랑을 시작했다. 언젠가부터 창문 밖만 쳐다보고 김민주를 기다렸다. 이름도 나이도 아무것도 모르지만 그냥 그랬다. 첫눈에 반했다. 그 말이 아니고선 이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단어가 없다고 느껴졌다.
/
20살 김민주. 갓 스물 타이틀을 가슴팍에 단 민주는 세상 모든 것들이 행복 그 자체였다. 1월 1일 12시 땡땡땡이 되자마자 소주병을 따고 잇는 자신이 멋져 보인다고 생각했었다. 나도 이제 으른이다. 뭐 그런 느낌. 나중에 생각해보면 진짜 쪽팔려서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을 정도였지만. 그렇게 폭풍 같은 1월 2월이 지나고 새내기로 입학한 민주는 캠퍼스 로망을 꿈꿨다. 김민주의 캠퍼스 로망이란 연애나 뭐 귀찮은 것들은 아니었다. 아메리카노 한 잔 딱 사서 전공 책 끼고 등교하는 거. 그게 김민주의 가장 큰 캠퍼스 로망이었다. 그렇게 김채원을 처음 만났다. 로망 실현을 위해 간 카페에서 김채원을 처음 만났다.
처음에는 알바생에게 관심도 없었다. 딱히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었으니까. 그렇게 매일 카페에 얼굴도장을 찍었다. 1학년 1학기가 끝나는 날까지 민주는 별다른 일이 없으면 카페에 꼭 들려 아아를 샀다. 가끔 마카롱이나 마들렌도 사고. 그렇게 3개월쯤 매일 카페에 갔을 때. 알바생이 자신에게 내민 종이 한 장을 받아든 민주는 이내 웃음이 터졌다. <<나이는 21살이고 이름은 김채원이에요. 번호는 010-0801-2000. 친하게 지내고 싶어서.>> 라고 적힌 쪽지. 처음 쪽지를 받았을 때는 당황스러웠지만, 귀까지 벌게져서 자신에게 쪽지를 내미는 채원이 너무 귀엽게 보였다.
"제 이름은 김민주요. 나이는 20살이에요. 저두 언니랑 친해지고 싶으니까 문자 보낼게요."
/
그렇게 민주와 채원은 처음 만나게 되었다. 적색 별. 가장 뜨겁고 가장 빨간 별이다. 그만큼 그때 서로의 감정은 빨갛게 익은 채원의 귀처럼 활활 타올랐다. 봄은 한참이나 지났고, 찝찝한 여름이었지만 채원과 민주에겐 청량함이 가득 묻은 여름이었다. 3개월 동안 아무런 말도 못하고 김민주를 짝사랑한 김채원과 그런 김채원의 쪽지를 받은 김민주. 둘은 그렇게 한층 가까워졌다. 아직 청색의 별은 저멀리에 두고 그저 적색 별처럼 빨갛고 뜨겁게.
02. 주황색 별, 태양
민주와 채원이 연락을 시작한 지 한 달쯤 지났을 때, 민주는 채원에게 바다를 보러 가자고 이야기를 꺼냈다. 자기는 매년 여름 혼자 바다를 보러 간다고. 올해는 언니랑 가고 싶다고. 민주는 훅훅 들어오는 표현들이 채원의 심장을 뛰게 했다. 와. 이게 연하들의 박력. 뭐 그런 건가. 알겠다고 대답한 채원은 생각에 잠겼다. 내가 바다를 언제 갔더라. 채원은 딱히 바다를 자주 가지 않았다. 워낙 서울에서 자라서 바다를 갈 이유도 없었고, 시골도 온통 산으로 둘러싸인 곳이라 바다를 볼 기회는 더욱 없었다. 둘이서 가는 첫 여행인지라 한껏 들뜬 마음을 품은 채원은 이번에는 꼭 고백을 하겠다 다짐 또 다짐하였다.
기차를 타고 강릉역으로 향했다. 기차 안에서 둘이 줄이어폰을 나눠끼고 노래를 들으면서 갔다. 이런 저런 얘기도 하고 계란이랑 사이다도 먹으면서. 가위바위보로 계란을 머리에 깨면서. 마치 어린 시절 들뜬 마음으로 현장 학습을 가던 그때처럼 말이다. 기차 안에서는 특별한 얘기를 하지는 않았는데, 뭐가 그렇게 좋았는지 도착할 때까지 웃었다. 그냥 김민주랑 함께인, 김채원과 함께인 순간이 특별했던 것 같다.
강릉에 도착한 민주와 채원은 곧장 호텔로 향했다. 체크인을 하고 나온 채원과 민주는 밥부터 먹자며 밥을 먹었다. 밥을 다 먹고 민주가 순두부 젤라또를 꼭 먹겠다고 비장한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알겠다고 대답한 채원과 민주는 곧장 순두부 젤라또 가게로 향했다. 안목 해변 주변에 젤라또 가게에 도착한 민주의 표정은 정말 어린아이 마냥 들뜬 표정이었다. 그런 민주의 표정에 채원의 기분까지 좋아지는 것 같았다. 순두부 젤라또 하나 인절미 젤라또 하나를 사 들고 바닷가로 나온 민주와 채원이었다. 언니 언니. 부드러운데 쫄깃해요. 너무 맛있죠. 누가 서울에도 만들어줬음 좋겠어요, 진짜루. 한참 민주가 순두부 젤라또를 찬양하고 있을 때, 수평선 멀리 해가 지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 파랗던 파다가 곧 주황색 물결로 바뀌기 시작했다. 수평선 너머로 해가 넘어가는 모습이 예뻤다. 괜히 몽글몽글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 지금이다. 채원은 가만히 앉아서 바다를 바라보는 민주에게 진심을 전달했다. 민주야. 네? 진짜 예쁘다, 그치? 맞아요. 진짜 예뻐. 너도 예뻐. 응? 너도 예쁘다고. 채원의 말에 바다만 바라보던 민주의 시선이 채원의 시선과 마주쳤다. 옆에서 시끄럽게 노는 사람들의 소리, 파도가 일렁이는 소리. 그런 소리가 순식간의 음소거가 된 것 같았다. 그곳에 자신과 채원, 그렇게 둘만 남은 기분이었다.
"나 있잖아. 너 처음 본 날부터 너한테 반했어. 그래서 알바하면서 너 오기만 기다렸어. 네 주문 받고 혼자 넋 놓다가 다음 손님 주문 놓친 적도 있었고. 3개월 동안 짝사랑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는데. 그래도 한 번쯤은 용기 내고 싶었어. 그래서 그날 너한테 쪽지 줬던 거야. 그만큼 내가 너 좋아한다고. 안 받아줘도 되거든? 근데 그냥 내 마음만 알아줬으면 해서. 모든 순간이 진심이었어, 나는."
"언니."
"응?"
"저두요. 저도 언니 좋아한다구요. 사실 쪽지 받기 전까지는 별다른 관심은 없었어요. 근데 언니가 그날 귀까지 벌겋게 달아올라서 저한테 쪽지 건네주는데 그게 너무 귀여웠어요. 그리고 언니랑 지금까지 연락하면서 제 마음도 커졌던 것 같아요. 괜히 언니한테 더 잘해주고 싶었구요. 또 제가 항상 하는 것들을 언니랑 같이 하고 싶었어요. 제 일상을 언니랑 나누고 싶었다구요. 그래서 같이 바다보러 오자고 얘기했던 거예요."
채원의 귀가 불타는 고구마처럼 빨갛게 타올랐다. 그런 채원의 귀를 손으로 잡아준 민주의 행동의 괜히 채원의 가슴이 저릿했다. 어느덧 해가 거의 넘어가고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제가 지금까지 본 바다 중에 오늘 바다가 제일 예쁜 것 같아요, 언니. 민주의 말에 채원이 민주의 손을 잡았다. 잡은 손을 깍지로 바꾼 민주의 행동에 채원의 귀가 다시 불타는 고구마가 되었다. 언니. 언니 귀 지금 불타는 고구마예요. 야. 너도 마찬가지거든? 어둠이 깔린 바다에서 채원과 민주는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게 수다를 떨었다. 내가 먼저 좋아했잖아. 그래도 내가 지금은 언니보다 더 좋아하거든요. 아니거든, 김민주? 내가 더 좋아하거든? 그렇게 여느 연인들이 나누는 유치뽕짝한 사랑싸움을 하면서 말이다.
해가 완전히 떨어지고 별이 가득 담긴 바다를 보던 그때의 감정은 마치 그랬다. 태양이 뜨겁게 내리쬐는 여름도 막지 못할 뜨거운 감정. 청량해서 푸르던 감정이 태양도 막지 못할 붉은색 사랑이 된 것 같은. 그렇게 김민주와 김채원은 뜨겁게 사랑했다. 주황색 별의 대표적인 태양처럼. 활활 타오르다 못해 서로가 아니면 가까이 갈 수도 없을 만큼 뜨겁게 말이다.
03. 황색 별
연애를 시작한 민주와 채원에게 서로는 1순위였다. 아니. 1순위도 아니고 0순위. 정말 서로의 눈에 서로가 아닌 사람은 들어오지도 않았다. 민주는 늘 그랬던 것처럼 매일 카페에 얼굴도장을 찍었고, 그런 민주를 반겨준 사람은 채원이었다. 수업이 끝나면 채원의 카페에서 채원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집에 같이 가고, 채원이 빨리 끝나는 날엔 민주를 데리러 학교로 향했다. 좋은 것만 보면 김채원 생각이 났고, 또 좋은 것만 보면 김민주가 생각나는 둘이었다.
그렇게 서로는 서로에게 일상이 되었다. 동거 아닌 동거까지 하게 되면서 둘의 사이는 더욱 활활 타올랐다. 채원의 집에서 같이 지내면서 둘은 알콩달콩 깨를 볶고 살았다. 물론 티격태격 사랑싸움도 하면서 말이다. 하루는 채원이 알바 끝나고 돌아와서 양말을 아무렇게나 벗어놨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날 김민주에게 잔소리 폭격을 맞은 기억이 있다. 언니! 양말은 바로 빨래통에 넣어야죠. 하면서 잔소리를 퍼붓는 민주에게 알겠다니까? 하면서 대답하다가 언니는 왜 그렇게 말해요? 하면서 진짜 별것도 아닌 걸로 싸운 적도 있었다.
딱 두 번. 채원과 민주가 크게 싸운 적이 있는데, 한 번은 설거지 때문이었다. 진짜 남들이 들으면 미쳤냐고 욕을 퍼부었을 것이다. 설거지를 안 해서 싸웠다고 하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게 아니었다. 설거지를 혼자 다 한다고 싸운 것이다. 채원이 설거지를 하겠다고 얘기해도 안 된다고 자기가 할 거라고 해서. 그래서 싸웠다. 정말 다시 생각하면 유치뽕짝 그 자체이지만 그땐 나름 진심이었다. 민주는 채원의 손에 물 한 방울 묻힐 수 없다고 화를 냈고, 채원은 내가 해도 괜찮다며 화를 내서 싸웠다. 싸움의 내용은 대충 뭐... 너는 날 너무 배려한다. 언니는 배려를 해도 화내요? 어쩌고 저쩌고.
그리고 한 번은 진짜 사랑싸움. 헤어지자는 말이 나올 정도의 큰 싸움이었다. 아마 연락 문제 때문이었다. 채원은 휴학한 알바생이고 민주는 학교생활을 하는 학생이니까. 아무래도 둘의 생활 패턴은 조금 다를 수 밖에 없었다. 채원은 낮에 바쁘고 민주는 수업이 없으면 낮에는 한가했다. 그리고 민주가 학교 끝나고 술을 마시러 가면 채원은 그제야 일이 끝날 시간이었다. 이런 문제들로 자주 다퉜는데 쌓이고 쌓인 것들이 폭발한 순간이 있었다.
그날따라 카페에 손님은 더욱 많았고, 그래서 민주에게 연락할 시간은 더욱 없었다. 민주는 채원이 연락을 받지 않길래 그냥 술을 마시러 갔다. 그리고 새벽 1시까지 아무런 연락이 없다가 동기 등에 업혀서 채원의 집에 왔던 것이 문제였다. 채원은 1시까지 잠도 안 자고 민주를 기다렸다. 새벽 1시에 민주에게 전화하자 전화를 받는 사람은 민주가 아니라 민주의 동기였다. 민주가 너무 취했다고 주소 좀 불러달라는 말에 화를 꾹 눌러 담은 채원이었다. 집에 들어와서 바로 잠에 빠지는 민주를 깨워서 화낼 기력도 없던 채원이었다. 결국은 아침에 크게 싸웠지만.
"너는 왜 연락을 안 해? 내가 너 기다리는 거 알잖아."
"그러는 언니는요? 저도 낮에 종일 언니 연락 기다렸는데, 언니 답장 없었잖아요."
"나 일하는 거 알잖아. 내가 바쁘다고도 이야기했고."
"그래도 답장할 시간은 있을 거 아니에요."
"내가 답장 안 하면 너 또 그렇게 술 마시고 다른 애 등에 업혀서 들어올 거야?"
"그건 제 잘못 맞는데, 그렇다고 언니는 잘못 없어요?"
"야. 김민주. 그럼 너는 잘했어? 잘못인 거 아는 사람이 그래?"
"됐어요. 저도 언니 기다리는 거 지쳐요."
지친다. 맞는 말이었다. 민주도 민주 나름대로 힘들었다. 학교 과제는 산더미처럼 쌓이고 곧 중간고사라서 더욱 힘들었다. 그래서 더 채원에게 기대고 싶었고 어리광도 부리고 싶었다. 그럴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채원도 알바랑 이것저것 바쁜 상태였고 그래서 민주도 지쳤던 것이다. 울컥하는 마음에 채원에게 화를 냈고, 채원은 뭐... 진짜로 화가 났었다. 연락도 없이 늦게 들어오는 것도 그랬고, 심지어 다른 사람 등에 업혀서 들어오는 것도 화가 났다. 그래도 김민주와 헤어지긴 싫었다. 헤어지기엔 너무 좋아하니까. 그래서 결국 둘은 화해했다. 긴 대화 끝에 화해도 하고, 다시 알콩달콩 티격태격. 그렇게 다시 서로의 일상에 스며든 민주와 채원이었다.
04. 황백색 별
민주와 채원에게도 '첫' 순간들이 존재했다. 첫 뽀뽀. 첫 키스. 첫 섹스까지.
첫 뽀뽀는 그날이었다. 사귀기 시작한 날. 별이 가득 담긴 바다를 보던 민주의 입술이 채원의 볼에 닿았다. 놀란 눈으로 민주를 바라보는 채원의 입술에 다시 입을 맞춘 민주였다. 짧게 쪽하고 떨어진 입술이지만, 김채원의 첫 뽀뽀였다. 유치원 꼬꼬마 시절에 해본 뽀뽀 이후로는 아마 처음이었다. 아, 물론 김민주도 마찬가지고. 민주는 채원에게 뽀뽀하고 등짝을 맞았다. 야, 너! 하면서 당황한 얼굴을 한 채원의 귀는 그날 종일 불타는 고구마였다.
그리고 첫 키스는 둘이 처음으로 술을 마신 날이었다. 거의 날마다 포장마차낭만가득을 외치는 민주를 데리고 포장마차에 갔던 날이었다. 낭만은 어때. 가득해? 하는 질문에 연신 고개를 끄덕인 민주는 그날 취했다. 볼이 벌겋게 달아올라서 막 애교를 부리는데. 그날 김민주는 정말 찐으로 귀여웠다. 원래도 애교 많은 연하 여친. 딱 그런 느낌이었는데, 취해서 부리는 애교는 평소보다 2배는 더 귀여웠다. 그런 민주랑 팔짱을 끼고 집으로 돌아오던 채원은 공원에 잠깐 앉았다가 가자고 민주와 벤치에 앉은 채원은 민주에게 볼을 내밀었다. 짧게 쪽쪽 하고 떨어진 민주의 볼을 잡고 있던 채원의 팔을 어느덧 민주의 목에 걸쳐있었다. 그게 민주와 채원의 첫 키스였다. 쪽하고 떨어지는 게 아니라 그... 어쨌든 그래 그거.
첫 섹스는 채원의 집 채원의 침대에서. 첫 키스하고 집으로 돌아온 날. 그날이었다. 씻고 나란히 침대에 누운 민주의 손이 채원의 옷 안으로 들어왔다. 자연스럽게 입을 맞추고 어쩌고 저쩌고. 그렇게 김민주와 김채원의 첫 순간들이 지나갔다. 그 뒤로는 매일 엉겨 붙어 있기 바빴지만.
05. 백색 별
언제까지나 익어가는 것 같다고 생각한 별이 시들기 시작했다.
채원과 민주가 사귄 지 3년째 되던 해, 둘은 권태기를 맞이했다. 누구 하나만 그런 게 아니라 둘 다. 그런 말이 있다. 밥 먹는 게 꼴 보기 싫으면 헤어져야 한다고. 처음에는 그런 사소한 것들이 질리기 시작했다. 질린다고 표현하는 게 맞는지, 지친다고 표현하는 게 맞는지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랬다. 그래서 매일 붙어살던 민주가 다시 기숙사로 들어가고 그런 민주를 채원 역시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채원도 취업 준비 문제로 바빴고, 휴학없이 대학을 다닌 민주 역시 취업 문제로 서로 바빴으니까.
그래서 더욱 서로가 서로의 0순위에서 밀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편했다. 매일같이 연락하고 하느라 신경 쓸 일도 많았는데, 딱히 그러지 않아도 괜찮았으니까. 아마 이때 채원과 민주는 깨달았다. 아. 우리가 권태기구나. 우리가 헤어질 수도 있는 사람이구나. 딱 그렇게 말이다. 맞는 말이었다. 지금 채원과 민주의 상태는 오늘 당장 헤어져도 이상하게 보이지 않을 상태였으니까.
하지만 두려웠다. 3년을 넘게 함께 지냈던 사람이, 언제나 내 편이 되어주던 사람이 옆에서 사라진다는 사실이 두려웠다. 시간을 가지자고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정말 헤어질 거 같아서. 이별이 익숙하지 않은 채원과 민주는 그게 더욱 두려웠다. 서로가 서로에게 '첫'사랑이었고, 그래서 이별도 처음이었다. 이별의 후폭풍을 겪어보지 못해서, 주변에서 힘들어하는 모습들만 봐서. 그래서 더욱 두려웠다. 아무리 권태기가 왔다고 해도 아직은 서로가 '우리'라는 이름으로 남아있었으니까. 우리라는 울타리가 깨지는 것을 김채원과 김민주는 두려워했다.
그래서 더욱 지쳐갔다. 딱히 이런 일로 이야기를 시작해봤자 크게 싸울게 눈에 보여서. 그래서 둘은 더욱 서로가 서로에게 가지고 있는 감정을 숨겼다. 그러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그냥 그랬다. 데이트를 해도 채원의 집이었고, 밥을 먹으러 가도 정말 밥만 먹었다. 손을 놓고 다닌 지도 오래됐고, 그렇게 김채원과 김민주는 이별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절대 식지 않을 사랑이라고 생각했던 붉은 사랑이 백색 사랑에 가까워졌다. 별은 그렇다. 적색이 가장 뜨겁고 수명이 길다. 하지만 청색에 가까워지는 별일수록 수명도 짧고 온도도 낮다. 김채원과 김민주의 사랑이 그랬다. 아니, 어쩌면 모든 사람들의 사랑이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영원히 식지 않을 것 같던 사랑이 차갑게 식어가는 중이었다.
06. 청백색 별
그렇게 별은 청색 별을 향해서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만난 채원과 민주는 여행 계획을 세웠다. 매년 여름 바다를 보러 갔던 둘은 올해 역시 함께 바다를 보러 강릉에 가기로 했다. 서로가 권태기임은 암묵적인 침묵으로 대신한 채. 서로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그렇게 열차에 오른 둘이었다. 기차에 타자마자 채원은 잠에 빠졌다. 민주와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괜히 진지한 이야기만 할까 봐. 그게 너무 무서웠다. 아직 아무런 준비도 되지 않았고, 이별을 견딜 자신도 없었으니까.
강릉에 도착한 둘은 처음 강릉에 왔던 날처럼 곧바로 호텔로 향했다. 호텔에 짐을 풀고 밥을 먹은 민주와 채원은 역시 순두부 젤라또를 향해 달려갔다. 여전히 어린 아이 같은 표정으로 젤라또를 바라보는 김민주의 표정을 눈에 담은 채원이었다. 그땐 마냥 귀엽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느끼는 감정은 어떤 감정인지 모르겠는 채원이었다. 내가 지금 김민주를 사랑해서 놓지 못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오랜 시간 쌓아온 정때문일까. 민주의 표정을 눈에 담으면서도 확신이 서지 않는 채원이었다.
젤라또를 사서 바다가 보이는 곳에 앉은 둘은 아무런 말도 없이 젤라또만 먹었다. 늘 그랬듯 사람이 많은 바닷가였지만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오직 파도 치는 소리. 바다가 일렁이는 소리만 들려왔다. 계속해서 복잡하던 마음이 가만히 일렁이는 파도를 보면서 조금은 청량해졌다. 잠깐이지만 김민주와 처음 바다에 왔던 그날 그 분위기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한참을 파도를 바라보던 민주가 먼저 입을 열었다. 해가 수평선 너머로 넘어가 주황색 바다가 만들어지고 있을 무렵이었다. 그때 그날처럼.
"언니."
"응?"
"우리 진짜 많이 변했다. 그쵸?"
채원은 아무런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뻔한 결말이 다가오는 영화처럼 어떤 말이 나올지 너무 뻔해서.
"나는 있잖아요. 언니랑 내가 영원히 그때 같을 줄 알았어요. 우리 처음 여기 왔던 그날처럼 설레는 감정만 가득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쉬운 일이 아니더라구요. 머리로는 언니를 사랑한다고 좋아한다고 생각하는데. 마음이 자꾸 부정해요. 나 분명 아직 언니 좋아하는데."
"민주야."
"그래서 계속 생각했어요. 내가 진짜 언니를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만나고 있는 게 맞을까. 아니면 나는 이제 어떡하면 좋을까. 근데 우리 너무 변했더라구요. 서로가 서로에게 1순위, 아니 0순위이던 우리는 이제 없어요."
"그래서 헤어지자고?"
"그게 맞는 거잖아요. 언니도 나도 너무 변했는데. 우리가 어떻게 계속 만나요. 언니도 알고 있었잖아요. 우리가 손을 놓고 다닌 지도 꽤 지났고. 연인보단 그냥 아는 사람. 그런 느낌이잖아요."
"나도 알고 있었어. 그래서 더 두려웠고. 사랑도 이별도 처음인 내가 이별을 견딜 수 있을까. 그게 너무 두려웠어. 우리가 변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았지만 무서워서. 무서워서 외면했어. 언젠가 우리가 헤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가지고는 있었지만, 막상 앞에 다가오니까 더 무섭네."
"저도 그래요. 너무 무서워요. 우리가 우리라는 이름으로 같이 있던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무려 3년인데. 우리가 남이 될 수 있을까. 우리라는 이름 뒤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을까 그게 무서워요. 근데 그게 무서워도 우리는 헤어지는 게 맞잖아요."
"알아. 너무 잘 아는데. 우리라는 울타리가 무너지는 게 너무 무서워. 이렇게 끝내면 우린 진짜 남이잖아. 학교에서 마주쳐도 반갑게 인사할 수 있는 사이가 될 수 없는 거잖아. 내가 널 잊을 수 있을까. 그게 너무 두려워."
"그래도 우리 그만 해요. 우리 여기서 안 끝내면 분명 나중에 크게 싸우고 헤어지겠죠. 저는 언니랑 좋은 기억만 품고 가고 싶어요. 언니한테 미운 기억 하나도 남기기 싫어요."
"그래. 우리 그만하자. 그게 맞는 거니까..."
"언니......"
"나는 민주 널 사랑한 모든 시간이 소중했어. 그래서 더욱 놓치기 싫었던 거 같아. 근데 우리 진짜 그만하는 게 맞는 거잖아. 그래서. 그래서 그만하자고 하는 거야. 네 마음이 어떤지도 알고 다 아니까. 그 시간을 잊는데 시간을 오래 걸리겠지만 잊어야지. 그게 서로를 위한 길이잖아."
"저 오늘 돌아가는 기차표 끊었어요. 언니 표는 내일이고. 이렇게 헤어지고 같은 방에서 자고 같이 올라갈 자신이 없어서..."
"알겠어. 먼저 가, 민주야. 잘 지내고."
"언니두요. 잘 지내요."
그렇게 김민주와 김채원은 헤어졌다. 민주가 채원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채원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다. 슬픔의 눈물은 아니었지만, 그냥 눈물이 새어 나왔다. 우리라는 울타리를 무너뜨린 민주와 채원은 그렇게 우리가 아닌 각자가 되었다. 그리고 해는 어느덧 수평선을 넘어간 상태였고, 바다에는 별이 가득 내렸다.
해가 가라앉던 바다에서 시작한 사랑이 별이 내린 바다에서 끝을 맞이했다.
07. 청색 별
별은 어느덧 곧 영원히 뜨지 않을. 사라진 별이 되어가고 있었다.
/
먼저 기차를 탄 민주 역시 기분이 이상했다. 같이 왔던 사람이 이제는 옆에 없다는 사실이. 정말 우연처럼 시작한 사랑이 이렇게 끝이 난다는 사실을 믿기지 않았다. 내일이 되면 다시 김채원이 잘 잤냐는 말을 할 거 같은데. 이젠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이 이상했다. 이별을 처음 맞이하는 민주는 집으로 돌아오는 기차에서 채원의 번호를 지웠다. 채원과 함께 찍은 사진이 모여있는 사진첩도, 카톡 대화방도 깔끔하게 정리했다. 대화방을 정리하기 전 나눴던 대화들을 보면서 더욱 실감했다. 우리가 변하긴 했구나. 끝이 없던 대화가 이젠 마침표를 찍었구나.
집으로 돌아온 민주는 남은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채원과 함께 산 잠옷이며, 채원의 칫솔, 채원의 옷, 커플티, 커플링. 그리고 같이 만든 폴라로이드 앨범까지. 싹 다 정리했다. 괜히 미련을 가지기 싫어서. 괜히 기대하고 싶지 않아서. 다시 만날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기 싫었다. 또 다시 똑같은 이별을 겪을 수도 있다는 불안도 싫었고, 좋은 기억만 남겨준 김채원을 미워하기 싫었다. 진심으로 사랑했으니까. 그래서 더욱 미련을 버렸다. 며칠은 잠들기 전 매일같이 울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나아졌다. 학교에서 김채원을 마주쳐도 아무렇지 않았고, 눈물도 흐르지 않았다. 그리고 그때쯤 새로운 사람을 만나기 시작했다.
/
숙소로 돌아온 채원은 민주의 짐만 빠진 공간을 한참 동안 쳐다봤다. 그제야 실감이 났다. 우리가 정말 헤어졌구나. 지독하게도 사랑했던 우리가 이제는 없구나. 늘 함께하던 사람이 이제는 없구나. 나는 이제... 혼자구나. 이별이 현실로 다가온 순간이었다. 휴대폰 화면 속 웃고 있는 김민주와 김채원은 이제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게 김채원은 이별과 마주했다.
다음날 집으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채원은 김민주와의 추억을 싹 다 지웠다. 딱 한 장의 사진만 빼고. 둘이 처음 찍었던 사진. 딱 그것만 빼고 다 지웠다. 아직은 인정하기 싫었다. 진짜 남이 되었다는 사실을. 날마다 붙어살던 사람인데 헤어지자는 한마디로 끝이 나는 게 너무나도 싫었다. 그 사진마저 없으면 정말 남이 되는 것 같아서 지우지 못했다. 김민주의 번호도, 김민주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온통 적어둔 메모장도. 모든 것을 지우고 그렇게 집에 도착한 김채원은 숨이 턱하고 막히는 기분이었다.
집 안 가득 진동하는 김민주의 향기때문에. 아직도 김민주가 집에 남아있는 것 같아서. 그래서 숨이 턱 하고 막힌 채원은 환기부터 시켰다. 얼른 이 향기를 빼기 위해서. 그리고 화장실에 남아있는 김민주의 칫솔, 같이 입고 자던 잠옷, 커플티, 커플링을 싹 다 정리했다. 그리고 폴라로이드 앨범까지. 정리하기 전 마지막으로 앨범을 쭉 훑고 나서. 그렇게 김채원은 천천히 김민주를 정리했다. 첫 이별의 후폭풍은 꽤 오래갔다. 김민주를 학교에서 만나면 쿨하게 아는 척을 할 수 없었고, 김민주가 다른 사람을 만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쿨하지 못했다. 그렇게 김채원은 헤어지기 전보다 김민주를 더 사랑하고 있었다.
/
바다 깊숙한 곳의 색처럼. 그렇게 김민주와 김채원의 관계는 청색 별이 되어 사라졌다. 이제 다시는 뜨지 않을 별. 사라져서 없어져 버린. 그렇게 김민주와 김채원은 이별했다.
Fin.
'20 SUMMER' 카테고리의 다른 글
OPEN YOUR EYES [w.이일 - 안유진 x 권은비] (0) | 2020.08.09 |
---|---|
별똥별에 소원을 빌면 [w.익명-김채원X조유리] (0) | 2020.08.09 |
여름의 나폴리 [w.테이 - 안유진x김채원] (0) | 2020.08.09 |
키키러브 [w.빵삼 - 안유진x김채원] (0) | 2020.08.09 |
비 때문에 [by.히온 - 김채원x권은비] (0) | 2020.08.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