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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SUMMER

키키러브 [w.빵삼 - 안유진x김채원]

 

 

   채원의 기억 속 유진은,

 

   세 살 많은 언니한테 꼬박꼬박 앞니가 빠진 치열로 흘리듯 워나, 워나 발음하던 것, 무릎이 까져 울먹울먹하던 것, 놀아 달라며 손을 이끌며 징징거리던 거 같은 것밖에 없었다. 채원은 때 탄 백팩을 떨구듯 내려 놓았다. 땀이 찬 캡모자를 벗으니 한결 시원해졌다. 유진을 빤히 쳐다 보았다. 채원의 머리통에서 한뼘쯤 더 큰 키가 이질적이었는데 어렴풋이 남아 있는 아이 때 얼굴이 낯설지 않았다.

 

 

   너구나, 유진이가.

 

 

 

 

 

 


키러브
w.빵삼

 

 

 

 

 

 

 

 

 

 

   “엄마한테 얘기 들었어. 비밀번호 얘기 안 해줬나?”

   “언니한테 연락할까 했는데 실례일 거 같아서…… 요.”

   “0801. 내 생일이야. 밥은 먹었어?”

 

 

   채원은 헝클어진 머리를 다시 묶으며 유진의 진한 회색 캐리어를 응시했다. 유진이 고개를 저었다. 점심 때가 지난 시간이었다. 유진과 룸메이트가 된 것에 대해 이유는 간단했다. 유진이 같은 학교에 진학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침 룸메이트가 본가로 돌아간 까닭에 투룸을 혼자 쓰기엔 부담되기도 했다.

 

 

   “배고파? 뭐라도 먹을래?”

 

 

   유진이 어색하게 뭐가 있냐고 물었다. 채원은 선반을 뒤적이며 햇반과 3분 카레를 꺼냈다. 카레.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또 다시 어쩔 줄 몰라 멀뚱멀뚱 서 있는 게 웃겨서 채원은 물을 채운 커피포트 안에 3분 카레를 넣으면서 웃음기 진 목소리로 말했다. 진짜 오랜만이다. 대체 몇 년 만이지?

 

 

   “5년 만…….”

 

 

   유진은 동네에 두 대 있는 5층 짜리 빌라의 주였던 젊은 부부들 중 가장 어린 부부의 둘째 애였다. 시골에서 할 수 있는 거라곤 농사 짓고 고기를 잡는 일밖에 없었는데도 젊은 부부들은 해마다 찾아와서 살림을 꾸렸다. 떡집을 차리고 슈퍼를 물려 받았다. 대개 아이가 커가면서 학원 하나 없는 동네를 어려워했으니 고등학교에 들어갈 무렵부터는 도시로 나갔다. 옆집 오빠가 읍내 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채 다신 돌아오지 않는 걸 본 채원은 유진도 그럴 것이라 생각했다. 결론적으로 안유진보다 채원이 먼저 나왔으니 틀린 생각이었나.

 

 

   “벌써 그게 그렇게 됐어?”

 

 

   유진이 멋쩍게 웃었다. 체교과라고 했던가. 곧잘 뛰놀던 걸 좋아해서 시간 가는 줄 모르다가 얼굴이 벌겋게 익곤 하던 유진을 떠올렸다. “그럼 체육 선생님 되는 거야?” 채원은 커피포트를 켰다. 때마다 뉴스에서 화젯거리가 되는 해수면 상승처럼 물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하는 소리가 들린다. 잘하면, 요……. 그러자 채원이 점잖게 웃음을 터뜨린다.

 

 

   “말 놔도 괜찮아. 뭘 새삼.”

   “그럴…… 까?”

 

 

   유진이 망설이다 대답했다. 그때 잠깐 아주 어렸을 때의 유진이 겹쳐 보였다. 유진과는 부모님끼리 어찌 된 영문인지 인연이 통해 오래 안면을 트고 자란 사이였다. 그때 만해도 잘 뛰지 못하는 아이의 손을 잡아 끌고 여름철마다 하루도 빠짐 없이 바다에 갔다. 채원이 도시 고등학교로 올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래서 수영이 느는 만큼 피부가 까맣게 탔다. 여름 방학이 지나고 학교에 돌아가면 늘상 아이들 피부는 새카맣게 그을려 있었다. 너나 할 거 없이 놀려 대다가 교실이 금세 소란스러워지곤 했는데, 그럴 때면 입학 첫날 앞문으로 빼곰히 얼굴을 내민 귀여운 유진이 떠올랐다.

 

 

   “너도 큰 걸 보니까 시간이 가긴 가나 봐.”

 

 

   채원은 희미하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햇반을 데우는 전자레인지와 커피포트가 저절로 꺼지기를 기다렸다. 팔짱을 끼고 주방 벽에 기댔다가 제대로 다시 유진을 마주 보며 섰다.

 

   비가 오는 날이 싫었던 이유가 단지 수영을 못해서였을 정도로 채원은 바다가 좋았다. 겨울보다 여름이, 등굣길 마다 즐비해 있는 홍매화보다 심심한 초록색 나뭇잎이 좋았던 것도 그래서였다. 발이 닿지 않는 수심의 물살도 좋았고 물 비린내와 짠내음도 좋았다. 유진도 좋았고, 유진의 언니도 좋았고, 옆집 동생도. 전부. 떠올릴수록 싫었던 게 드물었다.

 

 

   “아직도 편식해?”

   “그게 언제 이야긴데…….”

   “채소 못 먹었잖아.”

   “……중딩 때 절교했다가 요즘 친해지는 중이거든.”

 

 

   채원은 쿡쿡 웃었다. 애틋한 눈으로 유진에게 내가 너를 업어 키웠는데, 말했더니 유진의 눈이 도통 커져서 재빨리 반문했다. 아닌데? 맞거든.

 

 

 

 


 

 

 

 

 

   “손재민이가 그르케 좋냐?”

 

 

   굽던 삼겹살이 노릇하게 구워 갈 때쯤 예나가 운을 텄다. 아니, 안 추워요? 지금 겨울인데? 예나는 멋쟁이에게 계절은 없다면서 이 겨울에 새로 산 가죽점퍼 주머니에 한 손을 꽂아 넣고 남은 손으로 삼겹살을 뒤집었다. 응. 채원은 이미 취한 것처럼 흐흐인지 히히인지 웃으며 대답했다. 예나가 한숨 쉬었다. 진챠 어쩌다가 너가 연애에 꼬여서……. 아, 여기 좋은데이 한 병이요!

 

   키는 좀 작은 게 흠이어도 얼굴 괜찮고 나름대로 착한 사람을 찾기가 쉽나. 채원은 요즘 연애 사업으로 여념이 없었다. 방금 전에도 과탑쓰리 재민과 도서관 데이트를 하고 돌아오던 길이었다. 썸이 잘 풀리는 까닭에 술을 사겠다 했더니 예나는 한달음에 달려왔다. 물론, 연애를 쉬니까 슬슬 사람이 고팠고 거기 골라 잡힌 게 재민이었을 뿐이지만. 상상은 예나가 앞접시 좀 놓으라는 말에 금방 깨졌다. 웃으면서 수저통에서 젓가락을 꺼냈다. 그새 예나가 한입 크기로 자른 삼겹살을 앞접시에 놓아주었다. 나온 소주를 잔에 채우고 짠. 어쩐지 술이 달았다.

 

 

   “언니는 연애 안 해?”

   “연애는 혼자 하남.”

 

 

   채원이 또 마셨다. 어어. 워니 무리하는 거 아니야? 이 정도는 괜차나. 내 핸드폰이 불 나겠구만. 제발 그거 지워주면 안 돼요? 웅 안 돼. 그런 평범한 대화들이 오갔다. 손재민에 대해 좀 말하다가 최예나의 <전공 교수님은 왜 항상 유쾌하게 잔인한가>에 대한 진지한 의견을 들어주었다. 예나의 말에 웃느라 정신이 없을 때 병이 빈 걸 확인했다. 한 병 더 시켰다. 그러다 보니까 금방 취했다.

 

 

   “볼링 치러 가쟈.”

   “언니 못 치잖아여.”

 

 

   예나는 말랑한 얼굴과 다르게 술이 셌다. 아직 제정신이었다. 채원은 말을 할 때마다 발음이 뭉개졌다. 야 너 취한 거 아니지. 제정신이지. 예나가 관자돌이를 손에 괸 채 상추를 생으로 씹었다. 언니야 말로 취했네. 아니거든.

 

 

   “재미니한테 전화 걸 꾸야.”

   “넌 분명 일어나자마자 후회하겠지.”

 

 

   그렇게 말해도 이미 신호음이 가고 있었다. 다른 이였으면 야 쟤 말려 하고 뜯어 말렸을 텐데 상대는 최예나였으므로 딱히 기대도 안 했다. 금방 전화를 받았다. 근데,

 

 

   “여자가 받는데?”

 

 

   덤으로 시킨 콜라를 마시던 예나가 콜록댔다. 뭐? 여전히 시야는 몽롱했는데 술이 좀 깨는 기분이었다. 가히 충격적이라고 표현할 만큼의 커다란 충격은 아니었다. 그냥 좀 들어나 보자.

 

 

   “이거 손재민씨 폰 아니에요?”

 

 

   그러자 반응이 떨떠름했다. 당황스러운 목소리로 “네?” 되묻는데 그제야 저장해둔 이름을 확인했다. [안유진]. 아……. 채원이 미안하다며 급하게 끊었다. 뭔데, 뭐야? 누군데? 예나가 호들갑스럽게 반응하는 동안 다시 전화가 왔다. 조금 긴장한 채 수락 버튼을 누르고 귀에 가까이 댔다.

 

 

   “많이 마시지는 말구, 빨리 들어와.”

 

 

   맞다 나 얘랑 동거 중이었지. 그제야 뭔가 깨달은 듯 외투를 껴입고 일어났다. 나 가야 해. 계산해 놓을 테니까 언니도 빨리 가. 니가 많이 취했나 보구나……. 예나가 중얼거리면서 따라 일어났다. 계산대에서 카드를 내는 동안 채원은 여기서 집까지 얼마나 걸릴지 가늠하다가 아직 막차가 끊겼는지 봤다. 그냥 택시를 불렀다. 예나는 아빠가 데리러 온댔다. 취기 탓에 화끈화끈한 얼굴로 택시 뒷좌석에서 예나에게 손을 흔들었다. 예나는 말랑한 입술을 꾹 다물고 손을 흔들어 주었다. 채원이 탄 택시의 번호판을 찍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일찍 왔네?”

 

 

   조금 졸린 눈으로 노트북 타자를 치던 유진이 눈을 비비면서 말했다. 미안. 배 안 고팠어? 유진이 에어팟을 빼며 고개를 흔들었다.

 

 

   “쌀이랑 밥솥 있길래 냉장고에 있는 걸로 해 먹었어.”

   “먹을 게 있었어?”

   “많았어. 언니 저녁 안 먹었으면 언니랑 같이 먹을까 했지.”

   “미안.”

   “안 미안해해도 되는데.”

 

 

   근데 많이 마셨어? 나 술 냄새 나? 아니. 얼굴 빨개서. 세수하고 올까? 양치도 하자. 알게또.

 

 

 

 

 

 

   “뭐 해?”

   “어렸을 때 사진 보내 주셔서. 앉아 봐요.”

 

 

   유진이 노트북에 앉아 웃고 있었다. 옆에 자리를 내며 탁탁 쳤다. 채원은 아직 얼굴의 물기가 덜 마른 채로 앉았다. 화면 속엔 지금 얼굴이 남아 있는 유진의 아이 때 사진이 몇 장 있었다. 간간이 자신과 유진의 투샷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럴 때마다 유진이 저때 어쨌고 저쨌는데 하면서 곱씹었다.

 

 

   “저 때가 기억 나는구나.”

   “언닌 안 나?”

   “아, 우리 맨날 놀았잖아. 너 넘어진 적도 많은데.”

   “언니가 하도 잡아 끄니까 그렇지……. 세 살이나 어린 나랑 언니 다리랑 같냐구.”

 

 

   그러면서 옆 사진으로 넘겼다. 때마침 읍내로 나갔을 때였다. 2007.08.01. 옆에 찍힌 날짜가 눈에 띄었다. 유진이 다섯 살이었고 채원이 여덟 살. 둘 다 어묵 꼬치를 조막만 한 손에 쥐고 힘겹게 브이하고 있었다. 언닌 어케 하나도 안 컸어. 너나.

 

 

   “저 때 언니 생일이었나?”

 

 

   그랬던 거 같았다. 여덟살 생일을 읍내에서 보낸 건 채원이 부모님에게 졸랐기 때문이었다. 읍내의 마을에서 볼 수 없는 높게 세워진 건물과 바빠 보이는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특유의 소음이 좋았다. 자동차가 빵빵대면 유진은 놀랐고 채원은 웃었다. 어! 빠방이다! 채원이 손가락으로 자동차를 가리켰다. 유진 부모님도 웃었다. 채원네 부모님은 유진을 괜찮아 괜찮아 하면서 달래다가 안아 들었던 것 같다. “저 때 언니 귀여웠다.” 유진이 화면을 뚫어져라 보면서 말했다.

 

 

   “너가 더 귀엽거든.”

   “언니는 완전 짱 귀엽거든.”

   “너는 더더 귀엽거든.”

   “언니는 예쁘기까지 하거든.”

   “너도거든.”

 

 

   그러다가 유진이 학학 웃음을 터뜨린다. 사람들이 보면 우리 재수 없다고 하겠다. 너가 더 귀여운데 자꾸 그러니까 그렇지. 채원이 볼멘소리를 내다가 따라 웃었다. 시계는 벌써 새벽 1시에 가까웠다. 유진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면서 이제 좀 졸린다고 말하고 방에 들어 갔다.

 

 

 

 


 

 

 

 

 

   고향 동네 꿈을 꿨다. 꽤 관리가 잘 된 바다였음에도 매년 휴가철에 관광객이 없어 한산한 바다와 오랜 역사를 품었을 법한 낡은 주택이 줄지었고 빌라 두 대와 규모 있는 슈퍼가 하나, 익숙한 초중고가 보였다. 꿈속 채원은 중학교 시절 교복을 입고 있었다. 몇 발자국 더 내디뎠더니 바다가 보였다. 지금 같은 겨울 바다였다.

 

   눈이 잘 오지 않는 지역이었다. 몇 년에 한 번 꼴로 결혼한 아들래미 마냥 인사만 슬쩍하고 오는 눈은 좋은 기억에 속했다. 얇은 눈 바닥에 찍히는 발자국을 보며 걸었다. 채원은 고등학생 때 도시로 나와 기숙사 생활을 했다. 하루에 세 대 들어오는 마을버스를 두 시간 가량 타고 주말마다 집에 갔는데, 2학년에 들어서고부터 주말에 머무르는 곳은 학교 근처로 이사 온 이모 집이 되었다. 누군가 힘찬 목소리로 언니! 불렀다. 두꺼운 외투와 목도리를 껴입어 눈사람 같은 초등학교 고학년의 유진이 뒤뚱뒤뚱 걸어오고 있었다.

 

 

   “안 추워?”

   “괜찮아.”

 

 

   유진이 채원 손을 잡아 끌고 자기 집 대문까지 데려갔다. 익숙한 파란 양철 대문 앞에서 망설이다가 문을 열려는데 꿈에서 깼다. 싱거운 꿈이었다. 어렸을 때 사진 보니까 반가웠나. 헝클어진 머리를 손으로 빗질하면서 나왔다. 따끔따끔 두통이 아렸다. 점심 때였다.

 

 

   “깼어?”

 

 

   주방에서 분주히 움직이고 있던 유진이 말했다. 아. 나 얘랑 같이 살지. 놀라면서 식탁에 의자를 빼 앉았다.

 

 

   “지금 뭐 해.”

   “어제 만든 거 데우는 중. 같이 먹자.”

 

 

   채원이 눈치껏 수저를 놓았다. 식탁이 이렇게 오래 낡았던가. 유진이 채원에게 안 읽는 책이나 두꺼운 종이를 깔아 달라고 해서 작년 전공 서적을 놓았다.

 

 

   “김치찌개야?”

   “응. 언니 이거 못 먹었나?”

   “아니, 잘 먹어. 좋아해.”

 

 

   유진이 양철 냄비 채로 가져왔다. 얼마 만의 집밥인지 세기도 피곤했다. 두 명이 먹기엔 좀 많은 양 같았으나 군말없이 한 입 떴다. 채원의 눈치를 보면서 유진도 먹었다. 채원이 입을 가리고 손가락으로 따봉을 만들었다.

 

 

   “어때? 괜찮아?”

   “어. 완전. 요리 누구한테 배웠어?”

   “함께 하는 요리 시간이었나…….”

   “그게 뭐야?”

   “요리 블로그.”

 

 

   아아. 채원이 대답하면서 한 입 더 먹었다. 이번엔 김치도 같이. 학식에서 파는 거랑은 달랐다.

 

 

   “그 분 요리 짱 잘하시나 보다.”

   “근데 그 분은 맛이 좀 순하더라.”

   “그래? 맛있는데.”

 

 

   햄도 넣었네. 두부도 있네? 집에 있었어? 여기 대체 누구 집이야? 몰라, 있는지 몰랐지이. 그러고 보니까 유통기한은 안 지났나 몰라. 안 지났었어. 결국 냄비를 비우고 밥도 전부 먹었다. 설거지는 내가 할게. 아냐. 내가 얹혀사는데. 또 한참이나 투닥거리다가 같이 하는 걸로 합의를 봤다. 좁은 싱크대에 둘이 껴들어가서 유진은 세제 칠을 했고 채원은 그릇을 헹궜다. 그러면서 학교는 어떤지 채원의 옛 친구들은 어떻게 됐는지에 대해 전해 들었다.

 

 

   “가볼래?”

   “어딜?”

   “우리 동네.”

 

 

   유진이 마지막 그릇을 닦다 말고 고민했다. 근데 엄마가 벌써 왔냐고 뭐라 하실 거 같은데…… 언니는 반겨 주시겠지만.

 

 

   “울 엄마가 너 엄청 좋아하실걸. 나 너 보니까 이모 보고 싶어. 응?”

 

 

   또 고민하는가 싶더니 결국 수락했다. 그래서 바로 나갈 채비를 했다. 케이티엑스 표를 끊고 (채원이 부담했다) 1박을 할지 당일치기로 가야 할지 이야기했다. 당일치기는 아무래도 부담이 있다고 1박으로 결정 났다. 제일 큰 백팩 하나에 옷 두어벌만 챙기고 패딩 안에 맨투맨을 껴입었다. 채원은 안 감은 머리를 가리려 나이키 볼캡을 썼다. 버스를 기다릴 시간 같은 건 여유 있게 남지 않았다. 정류장에서 조금 시시덕거리다가 시내버스를 타고 역까지 갔다. 속전속결.

 

 

   “나 사실은 꿈에 동네 나왔어.”

   “진짜?”

   “너도 나왔어. 너희 집이랑.”

 

 

   2시 33분. 휴대폰으로 확인했다. 3시 편 표를 끊었으니 출발까지 30분 남짓한 시간이었다. 채원은 케이티엑스 좌석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그래서 가자 했구나. 응.

 

 

   “날 진짜 좋아졌네. 햇빛 봐.”

   “그러게.”

   “나 오티 어떡하지.”

   “긴장하지 말구 잘 해.”

   “친구 사겨 올게.”

   “동네에서도 너가 친구 젤 많았잖아.”

 

 

   그랬나. 그랬어. 창문 사이로 햇빛이 들어 왔다. 히터가 텁텁한 공기를 뿜어냈다. 졸린 눈을 겨우 떠 옆 자리의 유진을 보았다. 창가를 보고 있어 무슨 표정인지 보이지 않았다. 그런 건 아무렴 어땠고 졸렸다. 잠에 들었다.

 

 

 

 


 

 

 

 

 

   “그렇게 오라 할 때는 안 오더니.”

   “바빴잖아. 이렇게 왔으면 된 거지.”

   “너는 유진이 아니었으면 진짜.”

 

 

   채원이 패딩을 벗으면서 낡은 가죽 소파에 앉았다. 간간이 영상통화를 하곤 했지만 저번 여름 방학 때 부모님께서 자취방까지 올라오신 뒤로는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미처 앉지 못한 유진이 어색하게 웃는다. 언질 하나 없었더니 여간 서운하시는 게 아닌지라 유진도 어머니를 달래는 건 마찬가지였다.

 

 

   “자식 새끼 키워 봤자라는 말을 믿었어야 했는데.”

 

 

   유진네 어머니가 말 없이 웃으시면서 고개를 끄덕거리셨다. 겨울이라 일거리가 줄어 집에 계실 거라 짐작은 했다. 특히나 어업에 종사하고 계시는 채원의 부모님이라면 더 그랬다. 근데 함께 계실 줄은. 두 분 다 좋으시면서 괜히 틱틱거리는 걸 알아서 별 말은 안 했다.

 

 

   “우리 오늘 자고 갈 거야.”

 

 

   허 참. 뻔뻔한 태도에 엄마가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그래 너 다 해먹어. 그렇게 말 안 해도 그럴 거예요. 채원이 지지 않고 대답했다. 만나면 거의 하는 류의 대화였으나 옆에서 유진이 눈치 보는 김에 채원이 먼저 사과했다. 알겠어, 담부턴 연락하고 올게.

 

 

   “아빠는?”

   “유진이네 아저씨랑 바다낚시 가셨어.”

   “이 계절에?”

   “원래 겨울 고기가 맛있다나.”

 

 

   엄마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직 패딩을 벗지 않은 유진이 그럼 저희가 데려와도 되냐고 물었다. 그래 주면 고맙지. 결국 채원이 벗은 패딩을 주워 입었다. 현관문을 나선 지 얼마 안 돼서 유진의 코끝이 빨개졌다. 주머니에 벌게진 두 손을 넣고도 유진은 연신 코를 훌쩍였다. 얼음에 미끌려 넘어질 뻔 한 것을 채원이 겨우 잡았다.

 

   오래 지나지 않아 방파제에 앉아 낚시하는 등을 볼 수 있었다. 채원이 고등학생 때부터 즐겨 입곤 하시던 외투였다. 채원은 웃으면서 다가갔다. 아빠가 여긴 어쩐 일이냐며 놀란 눈으로 채원을 봤다. 그 옆에 유진의 아버지가 따라 인사했다.

 

 

 

 


 

 

 

 

 

   아, 배불러. 엄마 좋아하셨지. 응. 엄청 좋아하시더라. 거의 옷방이 되어버린 채원의 방에 나란히 누웠다. 입에서 마늘 맛이 났다. 사랑 만큼 쌈에 마늘을 넣어주신 탓이다. 취기가 가실 틈 없이 진동이 울렸다. 채원의 폰이었다. 아, 누구야. 짜증 내며 확인했으나 곧 벌떡 일어났다. 뭐 해. 재민이었다.

 

 

   ―본가 왔지.

   ―어딘데?

   ―바다.

   ―재밌어?

   ―추워.

   ―ㅋㅋㅋㅋ

 

 

   그런 대화가 오갔다. 유진이 잠자코 실실 웃는 채원을 응시했다. 그러다가 말이 없어서 대충 잠들었을 거라 짐작하고 다시 누웠다. 두 시간 가량 재민과 카톡이 이어졌다. 휴대폰을 쥐고 있던 손이 뜨겁다는 것을 깨달았을 즈음에야 지금이 새벽이 넘어 갔다는 것을 알았다. 안 자? 자야지. 근데 너랑 카톡하는 거 재밌다. 나도. 그래도 자야 해. 알겠어. 잘 자. 좋은 꿈 꿔. 재민이 웃는 이모티콘을 보냈다. 채원도 웃으면서 새로 산 이모티콘으로 답장했다. 귀엽게 생긴 토끼가 잠옷을 입고 자는 그림이었다. 1이 사라지고 나서야 휴대폰을 놓을 수 있었다. 등이 뜨거웠다. 어렸을 때부터 팔불출이던 아빠가 감기 들지 말라며 장작을 많이 뗀 탓이었다.

 

 

   “재밌었어?”

 

 

   자는 줄 알았던 유진이 옆에서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그제야 옆에서 등을 돌리고 있던 유진을 봤다.

 

 

   “안 잤어?”

   “아니, 방금 전에 깼어.”

   “봤겠네.”

   “다는 아니구. 조금만.”

   “연애하거든, 요즘.”

   “남자친구?”

   “썸.”

 

 

   아, 혹시 저번에 그 손재민? 누군가 했네. 그건 제발 잊어주라……. 유진이 웃으며 말했다. 알겠어, 알겠어. 재빨리 돌릴 화제 거리를 생각했다. 넌 연애 안 해? 안 해도 재밌어. 재훈인가 걔랑 사귀지 않았나. 걔 여친이 들으면 기분 나빠 한다. 걔가 여친이 있어? 재작년부터 있었어. 재민의 두 시간에 걸친 바통을 유진이 다시 받은 기분이었다. 잠이 깼는지 유진이 재잘거리기 시작했다. 채원은 재훈의 여친에 대해 이야기를 듣다가, 고등학교 시절 연애사를 조금 풀었다. 2학년 때 사귄 애랑 1학년 때 사귄 애랑 말싸움이 붙어서 피곤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러고 보니까 언니 가고 전학 온 애가 있었거든. 유진이 채원 쪽으로 돌아 누웠다.

 

 

   “몇 달 못 넘기면서 왜 계속 사귀냐니까 뭐라 답했는지 알아?”

   “…….”

   “외로워서 사귄대.”

   “…….”

   “그게 내 연애면 슬플 거 같아.”

 

 

   대답이 없어 보니 채원은 잠들어 있었다. 볼수록 웃긴 언니였다.

 

   잠깐 눈을 감았다 떴더니 새벽이었다. 창문으로 푸른색 하늘이 비쳤다. 옆에선 아직 채원이 자고 있었다. 눈을 비비면서 휴대폰을 들었다. 채원의 부모님이 잠들어 있는 것을 확인하고 외투를 챙겼다. AM 05:25. 잠깐 산책이나 하고 싶어 나갔고 무작정 걷다 보니 바다 앞이었다. 유진은 아무 바닥에나 앉아 겨울 바다를 상상 속에서 유영했다. 파도 소리가 선명했다. 매섭지 않았다. 자갈로 발 장난을 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곧잘 채원의 집에 놀러오면 신고는 했던 채원의 삼선 슬리퍼 안으로 작은 알갱이들이 들어 왔다. 까끌까끌했다. 바다를 좋아했지. 같은 반 애들이 읍내와 시내를 번갈아서 노래를 불러도. 유진은 꾸준히 바다에 머무르길 원했다.

 

 

   “왜 여깄어?”

 

 

   깜짝이야. 놀란 눈으로 뒤를 돌았다. 채원이 서 있었다.

 

 

   “일찍 일어나서 산책 나왔지.”

   “우와, 나돈데.”

 

 

   채원이 킥킥 웃었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유진도 그냥 따라 웃었다. 옆에 자리를 잡아 앉았다.

 

 

   “아침 바다 좋지 않아?”

   “얘네는 아침부터 부지런하구나 싶어.”

   “나는 피곤하겠다 싶다. 아침부터 출근하는 거잖아.”

   “그게 뭐야아.”

 

 

   이번에는 유진이 웃었다. 채원이 유진의 어깨에 기대왔다. 어렸을 때 자주 기대고는 했다. 이렇게 바다를 보면서 말이다. 그때 생각이 났다. 파도가 머물렀던 곳에 발자국처럼 자갈을 잔뜩 적신다.

 

   아침을 먹자마자 바로 돌아오는 표를 끊었다. 부모님들은 아쉬워하셨지만 다음에 또 올게요, 할 수밖에 없었다. 오는 내내는 둘 다 잠에 빠지느라 대화는 안중에도 없었다. 약 하루 만인 자취방이 낯설었다. 불을 키고 각자 옷을 갈아 입었다. 티비 앞에 깔아 놓은 매트리스를 소파 삼아 앉아 넷플릭스로 퀸카로 살아남는 법을 봤다.

 

 

   “미국 영화라서 그런가? 욕이 엄청 많이 나오네.”

 

 

   유진은 엔딩 크래딧이 뜨자마자 그런 말부터 했다.

 

 

   “그게 끝?”

   “재밌었다?”

   “하이틴 안 좋아?”

   “그건 아니야. 재밌어서 좋아.”

 

 

   그러면 다행이다. 아, 키싱부스 볼래? 이것도 재밌다는데. 근데 언니 배고프지 않아? 별로? 왜, 배고파? 아니 그냥. 너 나랑 이거 보기 싫구나. 그건 진짜 아니야!

 

 

 

 


 

 

 

 

 

   오티를 다녀 온 유진을 매우 만족해 보였다. 원체 붙임성 좋고 유들유들한 성격이라 친구야 금방 사귈 거라 예상하긴 했지만. 채원은 머지 않아 교내 대나무숲과 에브리타임에 체교과 걔가 심심찮게 보일 것이라 짐작했다.

 

 

   “너 그거 기억나?”

 

 

   뭐가. 유진이 피곤한 얼굴로 한겨울에 아아메를 주입하며 대꾸했다.

 

 

   “제일 소중한 사람한테 꽃다발 주기 그런 거 했잖아. 너 6학년 때였나.”

 

 

   대꾸가 없었다. 채원과 한 번 눈을 마주치고 커다란 눈을 두세 번 깜박거리다가 아악, 하고 갑자기 비명 비슷한 걸 질렀다. 카페 테이블에 이마를 박았다. 채원이 놀라서 움찔했다.

 

 

   “기억 나, 근데 제발 그 얘기 안 해 주면 안 될까?”

   “너가 나한테 주면서 내가 너무 좋다고 했었……”

   “그거 완전 흑역사라고!”

 

 

   유진의 소리가 카페의 소란스러움에 묻혀 다행이었다. 채원은 의문스럽게 쳐다 봤다. 그러다가 문뜩 웃음을 터뜨렸다. 왜? 너가 그 꽃다발을 너무 못 만들어서?

 

 

   “어.”

 

 

   유진이 후드 모자를 쓰고 줄을 끝까지 당겼다. 따뜻한 머그잔을 쥐고 있던 손이 유진의 뒤통수로 옮겨간다.

 

 

   “그래서 귀여웠는데. 나 그거 방에 두고 반년이나 길렀어. 몰랐지.”

   “……진짜?”

   “응. 너가 써준 편지도 아직 있을걸? 저번에 본가 갔을 때 꺼내볼걸 그랬다.”

 

 

   유진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금세 헐렁해진 후드 모자를 벗었다. 구겨진 옷을 채원이 정리해 주었다. 살짝 떨어져서 채원이 칭찬을 바라는 눈빛으로 웃는다. 어려서부터 원체 식물을 못 기르는 성정이라 학교에서 다육이 같은 걸 받아오면 일주일 안에 시들게 했다. 반년은 상상할 수 없는 숫자였다.

 

 

   “대박. 언니도 나 엄청 좋아했구나?”

 

 

   유진이 장난처럼 하는 말에 채원이 웃었다. 당연하지. 뿌듯한 얼굴이었다. 유진 폰으로 전화가 왔다. 선호. 유진이 요즘 연락한다는 오티 때 사귄 친구였다. 그새 저장명이 바뀌어 있었다. 자기는 김채원 언니에서 채워니 하트로 바뀌는 데에 한 달이나 걸렸으면서 얼마 되지도 않은 공선호는 선호인 게 내심 서운했으나 유진은 이미 한참 전에 전화를 받으러 가고 없었다.

 

   채원의 머그잔이 비어갈 때쯤 유진은 밝은 얼굴로 돌아왔다. 묻지도 않은 통화 내용까지 술술 불었다.

 

 

   “곧 개학이라고 설렌대. 웃겨, 개학이래 개학.”

   “아…… 진짜? 고딩 티 못 벗었나 보네.”

   “근데 키랑 덩치는 고딩 안 같아. 옷도 잘 입던데.”

   “재민이는 키 작은데.”

   “그래? 학기 시작하면 넷이 한 번 보자. 아, 방금 전에 진짜 웃겼는 게……”

 

 

   유진이 연방 호들갑을 떨었다. 그동안 채원의 커피는 바닥났다. 머그잔이 무겁게만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까,

 

 

   “재민이가 만나자는데…….”

 

 

   예쁘게 하고 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는데 유진이 대꾸했다. 다시 공선호 이야기를 재잘거리는 탓에 어쩐지 대답이 건성처럼 들렸다. 평소였으면 선호란 애가 마음에 들었나 보네 하고 말았을 텐데 답지 않게 입술을 삐죽이며 서운한 티를 냈다. 근데 그도 그럴 것이 요즘 자꾸 공선호인지 뭔지 이야기를 해댔다.

 

 

   “나 뭐 잘못한 거 있어?”

   “아니.”

   “근데 언니 표정이 안 좋은데…….”

 

 

   유진이 빨대로 음료를 휘저었다. 얼음을 와작와작 씹었다. 그때 재민한테 전화가 왔다. 제대로 마무리 짓지 못하고 화장실로 갔다. 전화를 받자마자 재민은 “채원아, 5시 영화 어때?” 말했다. 낮고 차분하고 들뜬 목소리였다.

 

 

   “우리 만날 때?”

   “응. 괜찮아?”

   “나쁜 건 아니야.”

   “그럼 그렇게 예매해 놓을게. 보고 밥 먹으면 되잖아.”

   “그러면 되겠다.”

   “응. 빨리 보고 싶다.”

 

 

   재민 특유의 호흡이 얕은 웃음이 들렸다. 응. 나도. 그러나 채원이 먼저 전화를 끊었다.

 

   요즘은 재민이 옛날 만큼 좋은 것 같진 않았다. 왜인지 재민 자체에게도 콤플렉스인 작은 키, 약간의 결벽증, 채원에게 지적하는 습관 같은 것들이 자꾸 눈에 보였다. 그래도 괜찮았던 것들이 생각해 보니까 하나도 안 괜찮았다. 재민이 채원을 좋아하는 것도 좀 짜증 났다. 손재민이랑 있을 때보다 유진이랑 있을 때가 좋았다.

 

   손재민에게 죽고 못 살던 김채원이 이렇게 된 것에는 전적으로 2주 전 안유진에게 있었다.

 

   그때 유진은 근방에 대학교를 진학한 친했던 학교 선배가 불러 나간 뒤로 진탕 취해서 돌아왔었다. 유진은 채원을 보자마자 알아 듣지 못할 말을 웅얼거렸다. 옷도 갈아입지 않고 발라당 드러눕는 탓에 채원은 유진의 외투를 벗기느라 주량 가늠에 실패한 스무살의 주정을 들어줄 여유가 안 됐다. 그런 대꾸보다 넌 왜 하필이면 이런 걸 입었냐고 말하는 게 더 급했다.

 

 

   ‘나 중학교 때 언니 진짜 좋아했는데. 내내 주말에 언니만 기다렸는데.’

   ‘어, 미안해.’

 

 

   인상을 확 구기면서 무스탕을 벗겨 내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일어났으나 유진이 제 팔을 잡아 끌었다. 곧바로 제 위로 올라 온 유진이 소리내서 웃었다. 뭐가 웃기냐고 했지만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숨은 침착했다. 채원은 애써 짜증을 삭혔다.

 

 

   ‘일어나.’

   ‘시러요.’

   ‘알겠어, 언니가 미안해. 너 무거워.’

   ‘뭐가 미안한데.’

   ‘주말에 안 간 거, 너 마음 몰라 준 거.’

   ‘알고 있었으면 와야지이.’

   ‘언니 화낸다?’

   ‘말마다 언니, 언니. 나보다 키도 작으면서.’

   ‘…….’

   ‘…….’

   ‘……너 안 취했지. 야.’

 

 

   채원이 일어나려고 상체에 힘을 몰아 줬다. 그럴수록 유진이 더 짓눌렀다. 결국 포기했다. 큰 눈을 끔벅거렸다. 근데 너 중딩 때 진짜 나 좋아했어?

 

 

   ‘응.’

 

 

   유진이 중학생이 되고부터는 몇 번 본 적도 없었지만 만날 때마다 자길 피했던 게 선명했다. 채원은 본가에 놀러 갔을 때마다 같은 중학교 교복을 입고 고개만 꾸벅 숙이던 유진을 떠올렸다. 그게 못내 서운했었다. 그게 내가 싫어져서 그런 건 줄 알았어. 목덜미에서 유진이 바람 빠지게 웃는 게 느껴졌다. 언니 좋아해서 그런 거였는데.

 

 

   ‘손재민 짜증 나. 걔 싫어. 재수 없어.’

   ‘너보다 오빠야.’

   ‘내가 언니 더 좋아하는데.’

 

 

   유진이 삐진 목소리로 워나, 불렀다. 유진의 나이가 두 자릿수에 들어서면서 사라진 지 오래였던 호칭이었다. 유진의 입술과 귀의 거리가 가까워 숨결이 선명하게 들렸다. 워나. 워나, 워나. 채워나. 우리 언니. 언니는 내 거야. 유진은 그러고 푹 쓰러졌다. 채원은 유진의 무거운 몸뚱아리를 홀로 옮겨야 한다는 사실에 부정하기 바빴다.

 

 

   그러니까. 그날부터란 말이지. 손재민의 단점만 골라내는 필터처럼 뭐든 단점으로 직결해 내는 게.

 

 

 

 


 

 

 

 

 

   재민과 데이트는 생각한 것 이상으로 평범하고 형식적이었다. 공원을 돌았다가 카페에서 시간을 떼우고 영화 보고 밥을 먹었다. 지루하지 않았지만 재미있지도 않았다.

 

 

   “잠시만 갔다 올게.”

 

 

   하고 소화 시킬 겸 공원을 걷다가 사라진 지 10분 만에 재민이 저기서부터 뛰어왔다. 손을 등에 대고 있었다. 뭔가 들고 있구나. 역시나 가까이 왔을 때 등에서 비닐 포장지가 삐져나와 있었다. 꽃 포장지였다. 재민이 내미는 손에 예쁘게 포장된 빨간 장미꽃 두 송이가 들려 있었다. 미안해. 오래 기다렸지.

 

 

   “그렇게 오래는 아니고.”

 

 

   채원이 꽃을 받아 들며 장난스레 말했다. 진짜 미안. 미안해. 근데, 그……이런 말하기 미안한데, 재민이 쭈뼛쭈뼛 뒷머리를 긁었다. 뭔데 뜸을 들여.

 

 

   “나 군대 가거든.”

 

 

   기다리게 해서 진짜로 미안해, 같은 말을 예상하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 굳은 얼굴에서 채원은 웃으려고 노력했다. 노력에서 그쳤다. 재민은 눈은 못 마주치고 바닥만 응시한다. 채원은 사귄 적도 없지만 그게 어떤 신호라는 걸 알았다. 기다려 주던가, 떠나던가. 입을 열었다가는 도저히 좋은 말이 안 나올 거 같아서 그냥 닫았다.

 

 

   “그냥 그렇다고.”

 

 

   재민의 태연한 태도에 채원은 가슴팍에 장미꽃을 도로 안겨주었다. 나, 나 가야겠다. 미안. 아빠가 아프시대. 장작 떼 놓고 티비나 보고 계실 아빠를 팔아 그대로 뒤를 돌았다. 적당히 떨어져 있는 근처 편의점에서 제일 싸고 독한 보드카를 샀다. 한 병을 비우고서야 일어났다.

 

   손재민 미친놈인가. 채원은 헛웃음쳤다. 휴대폰 전원버튼만 괜히 눌렀다 껐다. 그냥 안유진을 좋아할까? 그런 생각하는 게 싫었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헤어밴드를 낀 채 양치하던 유진과 마주쳤다. 울컥했다.

 

 

   “왔어?”

   “유진아…….”

 

 

   유진에게 다가가서 안겼다. 당황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유진이 부탁하지 않은 토닥임을 두어번 반복했다. 지금 눈물이 나는 건 옅은 갈색 머리가 빡빡이로 변할 걔 때문이 아니고, 단지 걔 따위를 만난다고 유난 떨어 주었던 안유진이나 예나와 그 탓에 빡세게 한 화장과 새 옷 때문이었다. 울어요? 칫솔을 입에 문 채 조금 웅얼거리던 유진이 품속에서 물었다. 아이라인이 번질까 여태 손도 못 대던 눈을 비비면서 채원은 고개를 저었다. 같은 바디워시 냄새가 났다.

 

 

   “너가 공선호 이야기하는 거 싫어.”

   “갑자기?”

   “손재민도 싫고 공선호는 더 싫어. 양아치 같아. 걔.”

   “손재민이 왜 싫어. 뭔 실수했어?”

   “너는 좋아.”

   “나두.”

   “너 좋아한다고.”

 

 

   객기인지 취기인지 몰랐다. 여자 대 여자로서. 너랑 뽀뽀하고 싶은 의미로 좋아한다고. 너가 좋아했다며. 난 너 거라며. 나 진짜 대박 싫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입을 다물라 신호를 보내왔다. 다물고 싶었으나 제어가 안 됐다. 다신 그 술을 사지 않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유진이 품에서 벗어나 채원을 보고 있었다.

 

 

   “나 안 피하면 안 돼?”

   “…….”

   “유진아. 유진 언니이. 나 손재민도 버렸어.”

 

 

   약간의 술버릇인 호칭을 바꿔 부르면서 채원은 살짝 애교 떨었다. 유진의 얼굴이 잘 안 보였다. 얼굴이 화끈거렸고 발음은 무너져 갔다. 이거 김채원 쪽팔리게 하는 거였나. 나 진짜 왜 이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