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EN YOUR EYES [w.이일 - 안유진 x 권은비]
가장 친한 친구의 애인을 좋아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괴로운 일이었다.
권은비는 김채원을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을 하곤 했다. 여중과 여고가 붙어있는 곳. 같은 사진 동아리에서 활동하는 강혜원과 권은비 그리고 강혜원의 애인 김채원.
귀여운 후배가 들어왔다며 좋아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그렇게 될 줄은 몰랐다. 아니 아예 몰랐던 건 아니었다.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이 선후배의 그것 이상이라는 느낌이 들긴 들었다. 하지만 그러려니 했다. 흑백사진에 집착하는 강혜원과 그 강혜원을 잘 따르는 김채원이었으니.
얼마 지나지도 않은 것 같은데 어느새 둘은 사귀고 있었다. 그 후에 알았다. 자신이 김채원을 좋아하고 있다는 걸. 별수 없지. 은비는 아무에게도 말 못 할 자신의 감정을 구석에 처박아버렸다. 그렇다고 아무렇지 않았던 건 아니다. 둘이 붙어있는 모습을 보면 속이 쓰리다 못해 위가 뚫린 것만 같은 느낌이 들곤 했으니까.
그래도 어쩌겠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겠다. 강혜원이 죽고 난 후 시간은 화살처럼 쏜살같이 지나갔다. 김채원을 한 번이라도 더 보고 싶은, 허락되지 않을 감정을 그저 꼭꼭 숨긴 채 은비는 대학에 진학했다. A 대학 사진학과였다. 고등학교 졸업 후 자연스레 채원과도 연락을 끊었다. 먼저 연락하지도 않았다. 그편이 나은 것 같아서.
대학 생활은 생각보다 재밌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사진을 마음껏 할 수 있다는 점이 좋았고 새로운 사람들과 모여 다니며 노는 것도 좋았다. 새로운 것들을 경험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렇게 은비의 기억 속에서 김채원은 그 형체가 희미해져 가는 듯싶었다.
신입생이라며 인사를 하는 김채원을 제 학과 건물에서 마주치기 전까지는.
자신의 마음이 새어나갈까 숨죽여 지켜보기만 했던 시절이 있었는데. 이제야 겨우 잊었나 생각했는데. 다시는 마주칠 일이 없을 줄 알았던 김채원이 제 눈앞에 나타난 것을 보고는, 은비는 제일 먼저 한 일이 그저 웃는 것이었다.
실소에 가까운 웃음.
쟤는 왜 사진학과를 온 거야.
채원은 저를 보고 있는 은비를 발견하곤 반가워서 웃는 줄이라고 알았는지 은비에게 다가와서는 그래도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인사를 했다.
그 날 이후 어딘가 음침해진 구석이 있긴 했는데, 여전한 거 같네. 은비는 빙긋 웃음을 짓는 채원을 보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제 동기들이랑은 안 다니고 은비 저랑 다니는 걸 좋아하길래 그냥 별말 없이 같이 다녔다.
지난날의 감정들이 다시 살아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지 않는다면 그건 거짓말일 거야. 은비는 종종 제 앞에 있는 채원을 보며 속으로 읊조렸다. 묘하게 흘러나오는 죄책감에 어딘가 저릿하긴 했지만.
고등학교 때 남몰래 흠모할 수밖에 없었던 그 시기가 떠올랐다. 뭐 지금도 마찬가지구나. 눈에 밟히지 않는다면 다행일 텐데 또 그것도 아니야. 하지만 재수강 핑계를 대 채원과 같은 수업을 듣는 저 자신을 보고는 역시 별수 없다 보다, 하고 피식 웃었다.
과거는 과거로 묻어버리고, 싶은데. 쉽지 않네. 은비는 미간 사이를 손으로 짚었다. 채원더러 사람 좀 만나라는 잔소리 아닌 잔소리를 하는 건, 저 자신에게 하고 싶은 말이기도 했다.
그런 은비의 앞에, 안유진이 나타났다.
“저는 사체과 안유진입니다. 그럼 저는 권은비 언니? 언니라 불러도 되죠? 언니랑 촬영? 하면 되겠네요.”
와. 역시. 사체과. 훤칠하고 길쭉한 게 딴 세상 사람 같았다. 애매한 길이의 중단 발은 오히려 활동적인 느낌을 줬다. 샐쭉 웃을 때 호를 그리는 눈은 제법 예쁘단 생각을 절로 나게 했다. 웃을 때 폭파인 보조개는 어딘가 모르게 귀여웠다.
처음 보는 사람한테도 붙임성있게 말을 거는 것을 보며 활발한 성격이구나, 은비는 지레짐작했다. 마치 직업병 같은 거라, 관찰하는 것이 몸에 밴 은비였기에.
그러면서 저도 모르게 입을 떡 벌려 오, 라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좋은데.
그런 은비의 자그마한 탄성을 들은 것인지 유진은 수줍은 듯한 미소를 지으며 웃어 보였다. 아. 이럴 때가 아니지.
“그러면 되겠네요! 사체과에요? 잘됐다! 어쩐지 사체과 같더라. 해보고 싶은 거 있었는데! 잘됐다. 좋아요. 좋아요.”
은비는 재빠르게 유진의 말에 대답했다. 사실 해보고 싶은 거 그런 건 없었지만. 개뿔. 나중에 만들면 되잖아. 아무렴. 은비는 그저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촬영 말고도 더 해보고 싶은 게 생긴 것은, 한순간에 쏟아지는 소나기처럼 순식간이었다.
OPEN YOUR EYES
안유진 x 권은비
“그래서 해보고 싶은 게 뭔가요?”
물음을 끝으로 유진은 아이스크림을 입에 와앙, 물었다. 일단 컨셉을 잡겠다고 하면서 유진을 불러낸 은비였지만 제 앞에 있는 유진을 보니 쉬이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모델이랑 미팅하는 게 처음도 아닌데 왜 긴장되는 것 같지.
은비는 유진의 물음에 바로 대답을 하지 못한 채 그저 눈만 굴렸다. 뭐라도 말해야 하는데…. 뭐라도….
“라이프가드…?”
문득 어제 본 라이프가드 관련 기사가 떠올라 아무렇게나 내뱉은 은비였다. 은비의 대답에 유진은 입을 동그랗게 모으더니 팔자 눈썹을 만들었다. 너무 아무 말이나 했나 보다…. 은비는 녹차 아이스크림을 스푼으로 푹 찔렀다.
유진은 입에 넣은 아이스크림을 와그작거리며 골똘히 뭔가를 생각하는 것 같았다. 큰 두 눈이 멍하니 천장을 향했다. 곧이어 입을 떼는 듯했다.
“그럼…. 바다에 가는 건가요?”
“네?”
“라이프가드라면서요. 그럼 바다에서 촬영하는 거냐고요.”
“아…. 그래야 하겠네요.”
“아싸! 바다 좋아요!”
어째 스케일이 커지는 것 같은데. 식은땀이 나는 것 같은 기분에 은비는 멋쩍은 웃음만 지었다.
“근데 라이프가드 자격증 있어요?”
“네. 수영을 좋아하거든요.”
“우와. 난 수영 못하는데….”
“그럼 내가 알려줄게요! 바다 수영은 좀 다르긴 하지만. 그냥 놀러 간다 생각하고~”
“어…. 어? 그렇게까지 안 하셔….”
“왠지 휴가 같고 좋을 거 같은데요! 옷 스타일은 어떤 거로?”
바다라는 말이 나오자 유진은 신나서 떠들기 시작했다. 목소리가 점점 커지는 듯하더니 어느새 은비 옆으로 자리를 옮겨 은비에게 핸드폰 화면을 들이댔다. 뭐야?
“이런 거 어때요? 바다 하면 청량한 느낌! 이거죠! 이거죠!”
“그건 맞죠….”
과제 제출하는 사람은 저인데, 자기보다 더 열정적으로 임하는 유진을 보며 은비는 입장이 뒤바뀐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좋아하니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나…. 음. 그럼 일단 쇼핑부터 해야겠는데. 사이즈를 알아야 하는데…. 은비는 유진이 보여주는 사진들을 보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으음.
“언니. 근데 저 이런 옷 없는데. 쇼핑하러 갈래요? 같이 가요.”
“어? 어. 안 그래도 그 말 하려고 했었는데. 괜찮겠어요?”
“넹. 당연하죠~ 그리고 언니. 제가 동생인데 말 편하게 하세요~”
“아. 으응. 응. 그럴게….”
잠시만요. 오늘 언니랑 쇼핑간다고 민주 언니한테 말 좀 하고요. 오늘 가자는 뜻이었어? 넹. 당연하죠. 그…. 래. 넹넹. 유진이는 싱긋 웃어 보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까 그 김민주라는 애와 통화하는 것 같았다. 저녁은 같이 못 먹겠다며 미안한 표정을 짓는 유진을 보는데 알 수 없는 기시감이 훅, 올라왔다.
같이 밥 못 먹는다고 말하는 표정치고는….
“가요!”
“아?”
왜 그렇게 저를 뚫어지라 쳐다보고 있었어요. 너무 예뻐서 넋을 놓고 있었구나? 유진은 헤헤 웃으며 말했다. 얘는 이런 말을 잘도 하네…. 은비는 속으로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하지만 얄밉거나 그런 건 없었다. 천연덕스러운 웃음에 그냥 할 말을 잃는다고 해야 하나…. 은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가자, 가. 라고 대답했다.
***
“파란색이 잘 받는구나. 너는.”
스포츠 브랜드 한 쪽 편에서 은비는 감탄 조로 내뱉었다.
“그런 거 같죠? 이거 다 마음에 든다. 어때요? 잘 나올 거 같아요? 사진이 잘 나와야죠.”
“…넌 그냥 가만히 있어도 잘 나올 거 같긴 해….”
“네?”
“아니. 입어봤던 거 그냥 다 산다? 좀 여러 스타일로. 바다에서 촬영해야 하니까. 한 번에 최대로 착장 가야 해.”
“넹. 그래요!”
유진이가 보여준 사진은 흔하다면 흔한 사진이었다. 바다에서 찍은 래시가드 화보. 여름이면 어김없이 나오는 그런 것. 어찌 보면 너무 흔한 컨셉이라 패스할 만도 했지만…. 은비는 유진의 반짝이는 눈을 무시할 수 없었다. 아니 그냥 유진이가 하자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그림이다. 은비는 유진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아까 혼잣말로 중얼거리긴 했지만 진심이었다. 운동해서 피지컬은 말할 것도 없는데, 비율마저 일반인과 달라 보였다. 게다가 저 얼굴은 어쩌고.
옆에 붙어있으면서 계속 관찰했는데 웬걸, 귀엽기만 한 게 아니었다. 은비는 여러 번 속으로 감탄했다. 이게 포토그래퍼로서 구미가 확 당기는 것인지 다른 것 때문인지는 잘 구분이 안 되는 것 같았지만. 어쨌든. 흥미로운 것만은 틀림없다.
결정적으로 그냥 보고만 있어도 심심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계속 보고 싶었다.
“와. 엄청 많이 샀네…. 언니 괜찮아요? 출혈 클 거 같은데.”
“괜찮아. 어느 정도 예산 잡아놓은 게 있어서.”
“올~ 멋있다~ 언니 방금 되게 프로 같았던 거 알아요?”
“뭐래….”
온종일 붙어있어서 그런가? 제법 친해진 것도 같았다. 유진이 저를 언니라 부르는 거에 익숙해졌다. 게다가 무서운 듯한 친화력에 어느덧 저도 유진을 편하게 대하는 것이 스스로 느껴질 정도. 이렇게 빨리 친해진다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구나. 이것도 재능이라면 재능인가. 은비는 자신을 추켜세우기에 여념이 없는 유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생각했다.
“…니.”
“?”
“언니!!”
“어? 불렀어??”
아 또 넋 놓고 있었네. 왜 이러지 오늘. 은비는 머쓱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저희 바다 언제 가냐고요. 숙박해요?”
“숙박…?”
아. 그건 생각 못 했는데.
“놀러 가는 셈 치고 숙박비는 더치페이해요. 더치페이. 아니 제가 더 낼게요. 아니 그냥 제가 낼까요? 바다 너무 가고 싶은데! 언제가요?”
“이거 놀러 가는 게 아니라 내 과젠데….”
“그게 그거죠~“ 유진은 넉살 좋게 웃었다.
이건 또 무슨…. 은비는 하, 하고 피식 웃었다.
“맞죠? 웃는 거 보니 맞네~”
“….”
“나 언니 처음 봤을 때부터 마음에 들었는데. 너무 재밌을 거 같아요.”
“어헣? 응 나도.”
얜 진짜 이런 말이 낯간지럽지도 않은가 봐. 너무 아무렇지 않게 웃으면서 말하니까 당황스럽네. 은비는 얼떨결에 자신도 그렇다는 대답을 해버렸다. 왜 말리는 기분이 들까. 분명 나보다 어린데 제법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제 막 만난 앤데…. 저가 너무 생각을 깊게 하는 것 같았다. 과제나 잘 하자 은비야….
“자세한 계획은 따로 연락이나 만나서 하자. 일단 이번 주말부터 가야 할 거 같아.”
“넵.”
***
“와 진짜 라이프가드 같다.”
옷을 입혀 놓으니 예상했던 모습이 그럴싸하게 나왔다. 그래 저가 보는 눈은 있어. 은비는 스스로 칭찬을 하며 흡족하게 웃었다.
쨍쨍하진 않았지만 촬영하기에 적당한, 그런 날씨였다. 구름이 솜처럼 퐁퐁 솟아오르듯 널려있었고 그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이 바다를 빛나게 했다. 반짝이는 유리처럼 일렁이는 바다를 보니 눈이 시릴 것만 같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수평선은 아득했다.
신발에 모래가 들어간다며 벗고 다니는 게 낫지 않겠냐는 유진의 말을 듣고는 맨발로 해변을 걸었다. 발가락 사이로 쓸리는 자잘한 모래알들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유진이는, 바다와 썩 잘 어울리는 아이였다. 어색함이 없었다. 바닷가에서 태어났다고 해도 믿겠다…. 은비는 카메라의 LCD 창에 뜨는 사진들을 훑으며 생각했다.
“멋있네….”
“어 방금 멋있다고 한 거죠!”
유진은 귀신같이 은비가 혼잣말하는 걸 잡아냈다. 해가 쨍쨍하지 않는다 해도 해변은 해변. 그늘 없는 곳에서 촬영을 진행해서 그런가? 유진은 두 볼이 불그스름하게 상기된 얼굴로 까르륵 웃었다.
저거다.
은비는 뭐라 말할 사이도 없이 동물적인 본능으로 유진을 향해 셔터를 눌렀다.
“어? 대답은 안 하고 갑자기….”
“이뻐서.”
은비는 무의식적으로 툭 내뱉었다. 이쁜 걸 보면 손이 저절로 가는 걸 어떡해. 대답하고선 아차 싶었다. 근데 변명 같은 건 하기 싫었다. 구태여 왜.
“….”
유진은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을 역력히 드러내고는 눈알만 요리조리 굴리고 있었다. 당황이라는 걸 하나 보네 얘도. 은비는 옅은 미소를 띠며 고개를 숙여 다시 LCD를 쳐다봤다.
“다른 거로 갈아입고 스타일 좀 바꿔서 촬영해볼게.”
“아, 넵!”
제 손을 꼼지락거리던 유진은 은비의 부탁에 우렁차게 대답을 했다. 바로 앞에 있어서 그렇게 크게 대답 안 해도 되는데…. 아. 죄송해요. 헷. 유진은 머쓱한 듯 실실거리며 옷을 갈아입으러 화장실로 걸어갔다.
재밌네…. 은비는 멀어져가는 유진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중얼거렸다.
사진을 하다 보면, 그런 순간들이 더러 있다. 이건 꼭 담아야 해, 그런 순간. 단순히 이뻐서가 아니라, 피사체를 바라보는 그 순간 느꼈던 자신의 감정을 담기 위한 것이라고 해야 하나. 그래서 사진을 돌아보면, 촬영 당시의 감정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일기처럼 글자가 올려져 있는 건 아니지만, 글자 그 이상의 것이 담긴 것.
“이건….”
은비는 LCD 창에 떠 있는 유진의 웃는 얼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이건…….
“계속 촬영하러 가시죠~~”
유진은 저 멀리서부터 팔을 붕붕 돌리며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진짜 대형견같다니까. 은비는 유진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쳐다보며 생각했다. 우다다 달려오는 모습은 영락없는 멍멍이었다.
“딱 집중해서 끝내자.”
“좋아요!”
***
“지금 비 맞은 거 같은데.”
“비?”
구름이 좀 끼나 싶더니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비를 맞았다며 언니는 못 느꼈냐고 유진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어봤다.
“어.”
카메라 셔터 위에 놓인 손가락 위로 톡, 하고 빗방울이 떨어졌다. 뭐야. 비가 온다고? 갑자기? 은비는 토끼처럼 커다란 눈을 하고선 곧바로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소나긴가본데. 이런.
“일단 짐 정리하자. 이거 소나기 올 거 같아.”
“그럴 거 같아요. 이거 좀….”
유진은 자신의 가방에 옷을 아무렇게나 넣기 시작했다. 은비도 서둘러 장비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빗방울이 조금 굵어지나 했더니 순식간에 후두두 쏟아졌다. 어, 어. 장비 젖으면 안 되는데. 은비의 손이 더 빨라졌다.
어? 갑자기 비가 멎은 듯한 느낌.
“카메라 물에 젖으면 안 되지 않아요?”
유진이 자신의 윗옷을 펼쳐 은비를 감싸고 있었다. 야. 너 비…. 은비는 마지막 플래시를 넣고는 가방을 잠그면서 말했다. 괜찮으니까. 일단 저기 망보는 곳까지 뛰어요. 어? 어. 은비는 가방을 꼬옥 안은 채 유진과 같이 뛰었다. 모래사장이라 발이 푹푹 꺼지는 바람에 몇 번 휘청거렸다. 유진은 어느새 은비의 허리에 자신의 팔을 감았다.
“이렇게 갑자기 오는 거 보니 금방 그치지 않을까요.”
두두두둑 양철로 된 지붕을 두드리는 빗소리와 유진의 목소리가 섞였다. 라이프가드들이 망을 보는 양철로 된 탑은 흰색 페인트가 군데군데 벗겨져 있었다. 은비도 은비지만 유진도 물에 흠뻑 젖은 생쥐 꼴이 되었다.
“너 괜찮아? 내 장비 가린다고 너 비 다 맞았잖아….” 은비는 물기 어린 목소리로 유진을 향해 물었다.
“괜찮아요. 제가 몸은 튼튼해서. 헤헤. 장비 딱 봐도 비싸 보이는데 고장 나면 안 되잖아요.”
“이거야 새로 사면 되는 건데…. 아무튼 고마워.”
“고마우면 나중에 밥 사기~”
“지금 농담이 나오냐.”
“농담 아닌데~ 에취!”
뭐야. 너 감기 걸리는 거 아니야? 은비는 눈이 동그래져서는 유진을 향해 몸을 돌렸다. 이리 와봐. 자신의 손을 유진의 이마에 갖다 댔다. 이거 좀 뜨끈뜨끈한데. 은비는 미간을 구기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안아줘요.”
은비는 자기가 잘못 들은 것으로 생각했다.
“추우니까. 감기 안 걸리게 안아달라고요.”
“어? 어…?”
“얼른.”
아니 크잖아. 너는…. 은비는 어쩔 줄 몰라 햄스터처럼 손을 곱게 모아 입술만 잘근거렸다. 귓가를 때리는 빗소리가 점점 희미해져 갔다. 유진은 답답하다는 듯 은비의 두 팔목을 덥석 잡아 끌어올렸다. 자. 어서요. 어어….
인간 핫팩이야 뭐야…. 진짜 감기 걸렸나 봐 이렇게 따뜻할 수가 있나. 은비는 자신의 품에 가득 닿는 유진의 체온을 느끼면서 생각했다. 유진은 은비의 어깨에 턱을 괸 채로 조용히 있었다.
빗소리가 멈췄다. 아니, 정확히는 들리지 않았다.
제 심장 소리만이 귓가에 가득 울려 퍼졌다.
으아. 은비는 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이를 꽉 물었다. 그러면 심장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을 것 같아서. 할 수 있는 노력이었다.
다행히 유진은 아무 말이 없었다.
얼마나 서로를 안고 있었을까. 눈에 보일 정도로 비가 멎기 시작했다.
“얼른 숙소로 가자. 이제 그칠 것 같아.”
“네….”
몸이 많이 안 좋은가 본데. 유진이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로 힘없이 대답하는 모습을 보고는 은비는 속으로 걱정했다. 미리 날씨를 체크했어야했는데…. 저의 실수다 이건. 프로답지 못했다. 은비는 자책했다.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권은비 멍청이….
둘은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
“씻었어? 몸은 좀 어때. 여기 급한 대로 편의점에서 약 사 왔어.”
병든 병아리처럼 비실거리는 유진을 먼저 씻고 누워있으라며 욱여넣고 편의점에 다녀온 은비였다. 혹여 늦을까 봐 슬리퍼를 신고 달려갔다 왔다. 바닥에 고인 물들이 찰박거리며 튀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고마워요. 미안해요. 괜히 저 때문에….”
“아니야. 내가 미안하지. 날씨도 제대로 확인 못 해서.”
“아니에요. 그러지 마요. 근데 언니 다 젖었는데 얼른 따뜻한 물에 씻고 와요.”
“응? 응. 여기 이거, 약인데 이거랑 이거….”
“저도 알아요. 잘 먹을게요. 고마워요.” 유진이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하. 은비는 긴장이 탁 풀려 그만 주저앉을 뻔했다. 자신이 없는 사이에 유진에게 무슨 일이라도 났을까 봐. 그래서 슬리퍼가 벗겨지는 걸 간신히 끌어 신으며 달려왔으니까. 이제 좀 안심이 되네. 은비는 희미하게 웃었다.
***
“유진아. 혹시 배고….”
아. 자네. 침대에 누워있는 유진은 숨을 쌕쌕 고르며 자고 있었다. 하긴 촬영도 좀 빡빡하게 했겠다…. 비도 맞았겠다…. 감기 기운도 있었지…. 곯아떨어질 만도 하지. 은비는 제 머리의 물기를 탈탈 털면서 조용히 읊조렸다.
“잠든 모습은 또 다르네…….”
은비는 침대 머리맡으로 가 우두커니 섰다. 수건으로 머리를 말리는 것도 잊은 채 유진을 뚫어져라. 내려다봤다. 조용히, 조심스럽게, 유진이 깰까 봐 눈치를 살살 보면서 그 옆에 슬쩍 앉았다. 그리고는 또 쳐다봤다. 분명 깨어 있었다면 자기 얼굴 닳는다고 그만 쳐다보라고, 그런 말을 했겠지? 은비는 유진의 그런 모습을 상상하고는 혼자 피식 웃었다.
신기하네. 경계심마저 우습게 뚫어버리고는 이렇게 가까이 있다는 것이. 촬영이 끝나도 계속 보고 싶을 거 같아. 은비는 유진의 이마 끝부터 턱 끝까지를 눈으로 훑었다. 생각할수록 신기한 아이야. 렌즈를 끄는 것만 아니고 사람 마음도 끄는 재주가 있네.
이불이 조금 내려간 것 같은데. 은비는 상체를 돌려 두 손으로 이불을 집어 끌어 올렸다. 조금 덥더라도 차라리 땀을 흘리는 게 낫겠지, 라는 생각을 하며. 근데 그 순간 유진의 손이 은비의 왼 손목을 덥석 잡았다.
“언ㄴ…”
지금 언니라고 한 건가? 은비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숨을 후, 하고 내쉬었다. 아 진짜 심장아….
“민주 언니…….”
민주? 김민주? 그 채원이가 촬영하는? 은비의 속에서 어딘가가 파삭, 하고 바스러졌다. 얘 뭐야. 잠꼬대야? 은비는 확인하기 위해 몸을 유진에게 가까이 붙였다. 얼굴과 얼굴이 가까워지자 자신도 열이 오르는 느낌에 더운 것도 같았다. 깨진 않았는데. 잠꼬대구나. 은비는 조심스럽게 숨을 내쉬면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속눈썹도 예쁘네. 은비는 이왕 가까이 있는 김에 얼굴이나 자세히 관찰하기로 마음먹고는 하나하나 살피기 시작했다. 또렷한 코. 한번 찔러보고 싶은 저 볼. 웃을 땐 보조개가 생긴단 말이지…. 아까의 그 웃음이 생각나 은비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촬영할 맛이 난다는 게 딱 뭔지 알겠다니까. 근데 입술이…. 입술도…. 말랑말랑할 거 같은데….
헛. 권은비 지금 아파서 자는 사람을 앞에 두고 무슨 생각을 하려는 거야. 은비는 고개를 부르르 저으면서 눈을 질끈 감았다. 그냥 모델이잖아. 채원이보다도 더 어린앤데. 게다가 안 지 얼마 됐다고. 두 눈을 꼭 감은 채로 혼자 주문 외우듯 중얼거리는 은비였다.
“지금 뭐 하세요?”
은비의 귀에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망했다. 두 눈을 뜨니 유진이 큰 눈망울을 똘망거리며 은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도대체 이 언닌 뭐지? 라는 표정을 하는 것 같은데 이건 저만의 느낌이길.
“…아…. 너 괜찮은지 보…보려고…. 아무 짓도 안 했어…. 진짜야….”
“이렇게 가까이서요?”
“어? 어…. 네가 너무 조용히 자길래 죽었는지 확인했어….”
이건 진짜 자기가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핑계였다. 은비는 소리 없는 아우성을 질러댔다. 그걸 말이라고 하고 있냐고.
“해도 되는데.”
“?”
뭘 해도 된다는 거야. 은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거?”
눈 깜짝할 새였다. 자신의 목덜미에 묵직한 느낌이 드는 것과 동시에 자신의 입술에 말캉한 느낌이 드는 것이. 어? 지금 이게 무슨…? 은비는 너무 놀라 그만 통나무처럼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가 없었다. 너무나 순식간이어서.
입술이 말랑할 것 같았는데, 진짜로 그렇네.
은비는 두 눈을 다시 감았다.
***
그 날 이후 은비와 유진의 사이는 기류는 묘하고, 묘했다. 그 누가 먼저 그 일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하지만 의식은 하고 있었다. 눈이 마주칠 때마다 동공이 흔들리는 걸 보면 알 수 있었다. 없던 일로 하기엔…. 은비는 한숨을 푹 쉬었다.
“세 번째 촬영일정 좀 잡고…. 오늘 같이 셀렉 좀 할래? 네 의견 듣고 싶은 것이 있어서.”
“넹. 언제요?”
“저녁 먹고 좀 있다가? 8시쯤? 우리 학과 건물 앞에서 만날까?”
“좋아요!”
“근데 좀 더운가 보네. 이마에 땀이 나는 거 같은데?”
“아. 하…하…. 괜찮…. 아요…”
미x. 얘 지금 그 생각한 거 같은데. 은비는 아차 싶었다.
*
“너…. 이마에 땀 나는 거 같아….”
더 밀려 올라갈 곳 없어 이마를 침대 헤드에 콩콩 박고 있는 은비가 유진에게 말했다.
“이뻐요?”
유진은 이미 풀려버릴 대로 풀린 눈을 하고선 은비의 말에 대답했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저 눈빛. 은비는 저 눈빛이 마음에 들었다. 저 눈빛에 사로잡히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 눈에 담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아쉬울 정도로. 이제껏 봐왔던 안유진과는 전혀 딴판이었으니까.
“…응…. 이뻐….”
“언니도…. 이뻐요…. 미치도록…. 이뻐요….”
“하….”
은비는 몸을 일으켜 유진의 이마에 맺힌 땀을 손으로 쓸었다. 끈적하게 젖은 머리칼을 넘겨주었다. 그리곤 입을 맞췄다.
***
“좀 이따 봐.” 은비는 서둘러 대답을 하곤 자리를 떴다.
사실 이렇게 피한다고 될 일도 아닌데. 없던 일로 덮어둔다고 해서 없던 일이 되는 것도 아니고. 진짜…. 나이 헛먹었나 봐. 어떡하냐 권은비…. 심지어 이 수업은 재수강이라 점수도 잘 나와야 하는데…. 마무리 못 하면 끝나는 거야.
“난 언니가 여자 좋아하는 줄 몰랐어요. 그냥 남자에 관심 없는 줄만 알았지.”
채원이 은비의 말을 듣고는 놀란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남자에 관심 없는 것도 없는 건데 사실 너를 좋아하고 있었단다. 은비는 하지 못할 말을 속으로 시원하게 말해버렸다. 김채원은 꿈에도 모르겠지. 몰라야 하고.
혼자 끙끙 앓는 것이 너무 힘들어 미친 척하고 채원에게 털어놓은 은비였다. 채원이라면 이해해 줄 것 같아서. 다행히 예상대로 채원은 놀라긴 했지만 그렇게 매우 놀란 눈치는 아니었다. 얘는 김민주라는 애랑 뭐 있는 것 같던데. 또 이게 이렇게 되네…. 은비는 이 상황이 아주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나한테 이런 걸 왜 물어봐요? 답정넌데?”
“아니. 난 진짜….”
“누가 먼저 고백하냐 그 타이밍 재는 거 아니에요? 좋겠네~”
“아니, 채원아….”
모르겠다고. 고백 같은 거 해본 적이 있어야지…. 은비는 땅이 꺼지라고 한숨을 푹, 쉬었다.
“별거 없어요. 그냥 좋다고 하면 되는데. 언니 이러는 거, 사실 보기 좋아요. 응원할게요.”
“아…. 고마워.”
“전 민주 만나러 내려가 봐야 해서. 언니 오늘 여기서 밤샘 작업?”
“엉. 아마도? 유진이 와서 같이 좀 보기로 했어. 셀렉때문에.”
“아 그래요? 그럼 저 가볼게요.”
응. 잘 가~ 은비는 나가는 채원을 향해 인사했다. 사실 말이 쉽지…. 진짜 잘 모르겠다고…. 은비는 텅 빈 작업실에 앉아서 골똘히 생각했다. 아니 사실 생각할 건더기는 없었다. 채원의 말마따나 정답이 정해져 있는 거 같아서. 문제는 자신이었다.
“아 뭐야. 김채원 USB 두고 갔네….”
은비는 책상 위에 놓여있는 USB를 집어 들고는 1층으로 향했다. 멀리 못 갔을 거야, 라는 생각을 하면서.
채원이 있나 보려고 복도에 난 창문 밖을 보는데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날씨 왜 이래. 아까 비 안 왔는데, 소나긴가? 은비는 입술을 쭉 내밀며 우산 안 가져왔는데 우씨, 라고 혼잣말을 했다.
비가 오나 안 오나 사진과 건물은 지하실 냄새가 났다. 항상 축축한 기분. 썩 좋은 느낌은 아니었지만 하도 들락거리니 그냥 애증인지 뭔지. 은비는 천장에서 새는 듯한 물방울을 피하면서 조심스레 1층으로 가는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무슨 소리야.”
1층에서 채원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다행이다. 아직 안 갔나 봐. 은비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나가기 전에 전달해줘야지.
“민주 언니 내 것이라고요.”
이건 안유진 목소린데? 은비는 그 자리에서 멈춰섰다. 무슨 상황이지? 저 둘이 뭔데 저런 대화를 나누는 거야.
“아니. 유진아. 괜찮다니까….”
김민주라는 사람의 목소리 같았다. 울먹이고 있네.
“거짓말하지 마요.”
김민주의 목소리와는 반대로 유진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단호했다.
“야. 네가 끼어들 일이 아니야. 그냥 가라.”
이에 질세라 채원이도 목소리를 바닥에 깔며 위협 조로 얘기하는 듯했다. 채원이는 유진이에게 왜 저렇게 말하는 것이며 유진이는 민주라는 사람을 제 것이라고 얘기하는 건 또 왜 그런 건데.
“야. 안유진. 그게 무슨 소리야.”
은비는 계단 한쪽에 선 상태로 분명히 말했다. 비가 와서 은비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건물 안에 울려 퍼졌다. 위에서 은비의 목소리가 나자, 셋의 시선은 동시에 은비에게로 향했다.
“은비 언니!” 유진이 은비를 발견하곤 소리 질렀다. 누가 봐도 난감한 표정이었다. 할 말이 참 많은 표정인데. 은비는 유진을 내려다봤다.
“둘이 잘 얘기해보던가. 가자.”
채원은 민주의 손을 잡아끌었다. 언니, 밖에 비 와요. 아 요 앞에 편의점에서 우산 사면 돼. 아…. 민주와 채원은 그렇게 건물 밖으로 빠져나갔다.
“일단 올라와.”
자신의 입에서 나온 말이긴 하지만 은비 자기가 생각하기에도 얼음장처럼 차가운 말투였다. 뭐 때문에 이렇게 화가 나는 걸까. 은비는 심호흡하며 천천히 계단을 다시 올라갔다. 뒤따라 올라오는 유진의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은비는 컴퓨터 앞 의자에 털썩 앉았다. 유진은 어쩔 줄 몰라 은비의 눈치를 보더니 슬그머니 옆자리에 앉았다. 두 손, 두 발을 가지런히 모은 채 제 손만 꼼지락거렸다. 아무 말이 없었다.
은비는 한숨을 후, 하고 내쉬고는 모니터를 켰다. 유진의 사진이 좌르륵 놓여있었다.
“와. 청량 컨셉에 맞게 편집 잘 하셨,”
“안유진.”
“…네….”
마우스를 쥐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그저 모니터만 응시했다. 근데 젠장맞을 안유진이 저를 보고 웃고 있었다. 어쩌라는 거야.
“할 말 없어?”
“어…….”
“난 솔직히 확신이 없었어.”
“네?”
“모르는 척하지 마. 너도 알잖아. 너도 그렇잖아.”
“….”
은비는 고개를 떨구었다. 이를 꽉 깨물고는 의자를 빙 돌려 유진을 정면으로 바라봤다. 안 그래도 습한 기운에 숨이 턱, 하고 막힐 것만 같은데 작업실의 분위기는 한술 더 떴다.
“나 솔직히 무서웠어.”
은비는 여전히 유진의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시선의 끝엔 유진의 손이 걸쳐있었다. 될 대로 되라지. 모 아니면 도다.
“뭐가요.”
“너도 알고 있었지? 내가 김채원 좋아했던 거.”
“어. 네. 대충?”
역시. 티가 나긴 했나 보네.
“난. 김채원이 다른 사람이랑 잘되는 그거보다 네가, 김민주를 아직도 좋아할까 봐. 그게 더 무서웠어.”
“….”
그래서 네가 아까 한 말이 너무 신경 쓰여. 그게 맞을까 봐. 은비는 이 말은 그냥 생략했다. 유진이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일까 봐. 그건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착각하고 있는 거면 말해줄래? 괜찮아. 저번 일은 그냥 해프닝으로 넘길 수 있어. 지금도 그러고 있잖아.”
“언니.”
“응.”
“내가 미안해요.”
아. 역시였나. 은비는 고개를 더욱 푹 떨구었다.
“내가 나빴네. 언니 이렇게 힘들게 하고. 미안해요. 몰랐어요.”
“?”
은비는 양 볼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유진의 손이 이끄는 대로 고개를 들자 유진의 눈이 앞에 딱, 나타났다. 이게 지금 어떻게 된 거라고? 은비의 눈이 허공을 향해 흔들렸다. 언니 나 봐봐요. 어, 어? 아까는 김채원이라는 사람이 민주 언니한테 좋은 사람인지 몰라서 억지 써본 거예요. 어? 아무것도 아니라고요. 그게? 네.
“저도 확신이 없었어요. 이게 맞나 싶어서. 사고는 칠 대로 쳐놓고. 참, 우습죠?”
“….”
“미안해요. 내가 먼저 말했어야 했는데.”
“아…. 니야…. 내가 더….”
은비는 말을 끝내 잇지 못했다. 왜 여기서 눈물이 터지는 거람. 은비는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 고개를 돌리려고 했다, 만 유진의 손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울지 마요. 언닌 웃는 게 이쁘니까.”
유진은 씩 웃으면서 엄지로 제 눈물을 쓱, 닦아주었다.
“뭐야 그게.”
은비는 바보 같은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언니. 그럼 우리 사귀는 거예요?”
“뭘 물어봐. 당연한걸. 이리와.”
은비는 유진의 멱살을 잡고는 제 쪽으로 훅, 잡아당겼다. 유진이 엇, 하는 소리를 내려고 했지만 이내 속으로만 낼 뿐이었다.
“으그 쓰쓰트브 읐쯔은느으?”
뭐라는 거야. 은비는 입술을 파, 하고 떼고선 유진을 뚫어지라 노려봤다.
“아 그냥 해.” 그리곤 다시 그 입을 막았다.
***
“사랑이 꽃피는 과제네~ 안유진 축하해?”
“뭐야. 너 말했어?”
“어…. 네….”
“안유진 너~”
“뭐 어때요. 이렇게나 귀여운 걸 어떻게 숨긴담.”
“아 네…. 두 분 행복하세요.”
김민주가 안유진과 권은비를 향해 손 인사를 하며 행복을 빌어주었다. 과제 전이라 모델들도 다 찾아와서 자신의 사진을 구경하곤 했다. 단연 화제는 채원의 사진이었지만 은비는 제 사진도 절대 뒤지지 않는다 생각했다. 자만심이 아니라 진짜로. 모델도 모델이지만…. 처음 해보는 컨셉치고 잘 뽑혔다고 생각했다.
“내가 잘 찍긴 했어. 그치?”
“나 엄청 고생했잖아요. 그리고 이건 모델뻘이라고요.”
“야. 너 지금 뭐라 했냐….”
“헤헤. 농담이고. 포토그래퍼님 덕분이죠!”
“귀엽긴….”
“이 사진…. 뜨겁네요…. 뜨거워….”
아 저 사진 찍은 날.
“야. 안유진. 그만해라….”
“내가 많이 좋아해요. 알죠?” 유진이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은비는 씨익 웃었다. 그리곤 저도 유진을 향해 속삭였다.
“나는 너 사랑하는데.”
얼굴 붉어지는 것 봐. 귀엽다니까.
은비는 유진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fin